향내가 흘러나오던 글

회귀천 정사 - 렌조 미키히코(시공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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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씨 등은 그림자가 참 연해."



하지만 이 때 순식간에 우리의 눈을 끈 것은 창문 너머 풍경이 아니라 노대에 불쑥 나타난 꽃 군락이었다. 썩은 냄새가 가득한 이 방에서 소녀의 유일한 희망이라고는 이 꽃을 키우는 일이 전부였으리라. 대여섯 개의 화분 가득 셀 수 없이 많은 꽃이 피어 있었다. 그것은 아직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이 방에서 말라비틀어지려 하는 한 소녀의 영혼을 대변하듯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탁한 공기가 주위에 근접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고, 빗물이 남긴 이슬을 반짝이며 그저 새하얗게 흐드러져 있었다.

이것이 나와 그 꽃의 두 번째 해후였다.

- p. 75. 도라지꽃 피는 집.




. 정말 밋밋한 경우가 아니라면야 그 작가의 책을 죽 읽다보면 왠만해선 작가의 특성이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가끔은 책을 집어들고 몇 페이지 읽자마자 이 책은 누구의 책이겠거니 하고 감이 오는 경우가 있다. 폴 오스터나 교고쿠 나츠히코, 레이먼드 챈들러처럼 문체 자체가 특이해서 그럴 때도 있고, 하루키나 와카타케 나나미, 가노 도모코처럼 문장 자체는 평이하지만 글이 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서 느끼게 될 때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니 렌조 미키히코 역시도 어떤 책을 읽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책 겉면을 통해 살짝 노르스름하게 바랜 종이가 드러나 있고, 뽑아보면 묵직하고 꺼끌꺼끌한 장정 위에 한꺼풀 먼지가 덮여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들. 단순히 책이 전쟁 직후의 시대를 다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조용하다 못해 피로감까지 느껴지는 듯한 - 그러면서도 더할나위없이 섬세한 - 어조로 진행되어 간다. 절망이나 불행을 토로하는 이야기들이야 많겠지만, 이렇게 낮게 가라앉는 듯하면서도 공간을 꽉 채우는 책은 정말 드물다. 그 분위기가 하도 자욱하기에 실제 '향'의 냄새가 흘러나오는 듯하다.


.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이야기는 모두 각각의 반전을 가진 추리 단편들이지만, '도라지꽃 피는 집'이나 '회귀천 정사'는 단순히 사건이 있고 반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추리소설의 영역에 넣기엔 좀 애매하게 느껴진다. 추리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기보단 일반소설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짧은 내용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에. 그래서 실제로도 다섯 편의 소설 중 '도라지꽃 피는 집'이 가장 애달프고, 가장 기억에 남았다. 오히려 '회귀천 정사'는 아름다운 표현은 있지만 전체 이야기가 주는 감흥은 좀 덜하다보니 표제작치고는 좀 아쉬운 느낌이었는데, 도라지꽃 피는 집의 제목이 조금만 더 그럴싸했더라면(^^;) 이쪽이 표제작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



마지막 의문, 스즈에가 창가에 서서 남자를 향해 도라지꽃을 던진 이유는 뭘까? 남자의 호기심을 자극해 확실하게 불러들이기 위해서라기보다 열 여섯 살 소녀만이 떠올릴 수 있는 동기, 즉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거야.

- p. 116. 도라지꽃 피는 집




. '오동나무 관'과 '등나무 향기'에서는 둘 다 체스터튼이 연상된다. 특히 오동나무 관은 '브라운 신부의 결백'에 나오는 "현명한 사람은 나뭇잎을 어디다 숨길까? 숲 속에 숨기겠지. 그렇지만, 숲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라는 명언을 그대로 본따온 듯한 느낌이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내용과 딱 맞아떨어지는 등나무 향기의 트릭도 참 좋았고. 어렸을 적의 기억에서 드러나는 모순들을 차례차례 파고 들어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이를 통째로 뒤집어버리는 '흰 연꽃 사찰'도 처음에는 내용을 따라가기에 급급해 잘 와닿지 않았지만, 단순히 반전이 끝이 아니라 반전으로 밝혀진 사실을 통해 더 큰 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 좋은 추리소설이었다.




전쟁에서 나는 나무로 짠 틀 위에서 불타는 수많은 시체를 보았다. 불꽃은 대륙의 모래 먼지에 녹아들고, 군복을 입은 채로 죽은 시체를 검은 그림자로 감싸더니 이윽고 재로 만들어버렸다. 전쟁터에서는 관을 준비할 여유 같은 것은 없으니 그것이 곧 화장이었다. 시체를 태우기 위해 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국 땅 들판에서 불타는 불꽃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시체를 태우기 위해 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을 태우려면 시체가 필요하지 않을까?

- p. 181. 오동나무 관



. 오히려 읽을때보다 읽고 나서 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느낌을 받게 하는 이야기였고, 다시 책장을 넘기기보다는 첫 페이지를 펼쳐놓고 좀 더 오래도록 책의 여운을 즐기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조화의 꿀', '백광'같은 작가의 다른 책들이 국내에 꽤 많이 소개되었는데, 각각 소재나 시대는 다를지언정 잘 정돈되고 무게감이 있는 글을 곱씹으며 한 장 한 장 묵묵하게 읽어갈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남은 소설들을 꾸준히 기대하게 된다.





배를 따라잡은 꽃들이 양쪽에서 뱃전을 감싸 안으며 앞장서서 흘러간다. 다양한 문양을 그리는 흰색과 보라색 꽃으로 어둠 속 강은 꽃무늬 옷을 두른 것처럼 보였다. 눈앞을, 덧없는 선을 그리며 어둠에서 다시 어둠으로 흘러가는 꽃들은 마치 소노다가 남긴 수천 수의 노래를 이루는 무수한 언어의 잎으로도, 소노다와 정을 나눈 여자들 속에 남아 있던 생명의 빛으로도 보였다.

- p. 358. 회귀천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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