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에 머물지 않고, 각각의 인생을 들여다본 수작

비뚤어진 집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by 눈시울


"그래. 사실 난 지금껏 허영심 없는 살인자는 만나보지 못했거든."



"그래.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누구나 몹시 고독한 감정을 느끼게 되지. 그래서 누군가에게 자기가 저지른 일을 몽땅 다 털어놓고 싶어지는 거란다 - 그런데 또 그럴 수가 없으니 더더욱 털어놓고 싶어지지. 결국 그래서 - 자기가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못하고, 살인 범행 그 자체에 대해 남들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무슨 이론 같은 것을 내세우곤 하는거야." - p. 133.




. 사실 포와로가 활약하는 화려한 작품들이 이어지다 그 끝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마무리짓는 1930년대와 비교해보면 1940년대에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가 보여준 성과는 상대적으로 빛이 바랠 수 밖에 없다. '0시를 향하여' 정도가 개중 손꼽힐만한 작품이고, 마플 양이 등장하는 '움직이는 손가락'이나 '서재의 시체' 정도가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소품, '회상 속의 살인'이나 '할로 저택의 비극'이 좀 이채로웠던 정도고. 나머지는 나처럼 마음먹고 80권을 읽어봐야겠어(!!) 생각하지 않는 바에야 딱히 접할 일이 없는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이다. 물론 중간에 전쟁도 있었고, 전후를 거치며 사회가 변하기도 했지만, 1940년부터 1948년까지 나온 작품이 14권인데 그 중에 추천할만한 소설이 1/3 정도라는 건 좀(....)


. 하지만 1949년에 나온 이 비뚤어진 집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한 단계 더 도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17년 전, 엘러리 퀸이 발표해서 어마어마한 찬사를 받고 지금까지도 역대급 추리소설로 남아있는 'Y의 비극'과 범인이 유사하기 때문에 지금도 'Y의 비극에서 이미 나온 이야기잖아?' 하는 반응이 종종 나오지만, 사실 읽고 나면 비뚤어진 집과 Y의 비극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슬슬 작품활동의 후반부로 접어들던 이 시기에 크리스티 여사는 트릭 자체보다는 사건 전후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간의 갈등과 그로 인해 드러나는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정통 추리소설인 Y의 비극과 달리 이 작품은 대가족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부호인 할아버지, 각각의 꿈과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이 꺾인 채 할아버지의 재산에 의지해 살아가는 자식들과 며느리들. 거기에 대부호와 결혼한 어리고 무력한 아내와 젊고 나약한 가정교사, 그런 가족들을 단호하지만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모할머니까지 단순히 추리의 정보로서가 아닌, 살아 숨쉬는 인물들 하나하나의 삶이 그려져 있는 게 이 작품의 특징이다.


. 이미 첫 작품인 '스타일즈 저택의 살인'에서부터 애거서 크리스티는 대가족을 구성하는 각각의 인물들을 능숙하게 묘사할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이 작품에 이르면 대가족은 더 이상 사건을 풀어나가기 위한 편리한 설정에 그치지 않는다. 각각 다른 유형의 인간이 등장하고, 서로 다른 이들은 가족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때로는 녹아들고 때로는 갈등한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사건과 이를 밝혀내는 수사를 거쳐 인상적인 결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서, 인물들은 그전까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 각자의 길로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성장했고 누군가는 그러지 않았지만, 어쨌든 모두에게는 달라진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인간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날씨가 아주 좋구나." 에디스 드 하빌랜드는 장갑을 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델 번호 10인 포드 자동차가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날씨가 차갑긴 하지만 상쾌해. 진짜 전형적인 영국 날씨지. 저기 저 앙상한 나뭇가지 좀 봐,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지? 누렇게 물이 든 나뭇잎이 한둘 아직도 매달려 있네...."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몸을 돌려 소피아에게 입맞추었다.

"잘 있으렴. 너무 근심하지 말아라, 소피아. 살다보면 피하지 말고 꿋꿋이 직면해야 할 일도 많은 거란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 가자. 조세핀!" 하고 외치더니 차 안으로 올랐다. 이어 조세핀도 그 뒤를 따라 차에 오르고는 에디스 옆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 출발하자 두 사람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 p.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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