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검고, 꾸물꾸물 감겨있는 이야기의 잔해들

백귀야행 (음) - 교고쿠 나츠히코(손안의책)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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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유가 하나의 결과를 낳는 게 아니야.
이유는 몇 개나 있고 결과도 몇 개나 있지.
그러니까 결심 같은 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대개는 우연히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게 옳지 않을까.



저 화려한 옷이 바로 신통력이다 -


- 저 옷.

그렇다면 저 옷이야말로.

그 커다란 옷깃 아래.

주름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그러다가 반짝 눈을 떴다.

"너는 나다."

갑자기.

아버지의 시체가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마도카 가쿠탄 - ."

옷의 얼굴이 씩 웃었다.

나는 그 얼굴을 난폭하게 움켜쥐고 - 그리고 - .

펄럭.

나는 지금 부족한 것이 없으며 마음이 청정하다.

1922년 가을 늦은 밤의 일이다.

- p. 425. 에리타테고로모




. 교고쿠도 시리즈의 또 다른 외전인 백귀야행 음/양편은 시리즈 본편에서 단편적으로만 다뤄졌던 이들의 이면에 깃들어 있던 어둠을 다루고 있다. 이 단편에 나오는 인물들은 스쳐 지나가는 단역이기도 하고, 아예 나오지도 않은 채 사건 설명에만 등장하는 피해자이기도 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사용된 채 버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거기다 화자인 세키구치의 프리퀄까지 실려 있기도 하고.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본편 이쪽 저쪽에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꾸물꾸물 감겨있는 게 이 백귀야행 음/양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감긴 것은 한결같이 어둡고, 검다. 새까맣다.


. 아무래도 외전이다보니 시리즈에서 비중이 높은 이들의 이야기가 더 반갑게 느껴진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는 역시 '우부메의 여름'의 주인공인 구온지 료코와, 그녀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나이토를 다룬 '후구루마요비'. 표현은 얼쩡거린다고 했지만 이 단편에서의 나이토는 찌질한 악역 그 자체였던 우부메의 여름에서와는 달리 상당히 애틋하고, 어떤 면에선 멋지게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가 데뷔작에서 찌질한 일회성 악역으로 사용한 채 내팽개친 나이토라는 인물에 대해 아쉬움 반, 미안함 반의 감정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교고쿠도를 통해 너무 성급한 제령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그만해요 - 이제 그만하세요."

나이토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하군. 취해 있었소. 괜찮소? 료코 씨. 당신 - 보통의 몸이 아니었지."

나는 - 몸을 구부리고 태아처럼 몸을 지킨 채, 어느샌가 울고 있었다. 운 것은 몇 년 만일까.

"나는 - 인간이 아니에요.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자예요. 태어나면서부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아니, 빨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은 짐이었지요. 그러니까 내버려두세요. 내버려둬요 - "

무슨 헛소리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머리가 아프다. 머릿속의, 도움도 되지 않는 기억이 부풀어오른다. 머리가 깨진다.

나이토는 선 채,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알았소. 알았어. 료코 씨. 당신은, 당신은 이미 - 반은 죽어 있는 것이군요."

나이토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 한 번 해보지 않고 죽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다는 것이라면 그건 - "

"사랑?"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내가 시선을 던지자 나이토는 그것을 피해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남자를 싫어해도, 껍질을 닫으려고 해도, 당신을 좋아하는 남자는 있다는 걸 조금은 아는 게 좋아요. 알겠소? 이치만 따지는 아버지나 엄격한 어머니도 반했네 어쩌네 하면서 결혼한 거요. 그러니 - "

"이제 멈춰."

"그러니까 - "

왠지 나이토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 p. 101. 후구루마요비




. 이 단편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철서의 우리'에 나오는 마도카 가쿠탄을 주인공으로 하는 '에리타테고로모'다. 철서의 우리에서는 허세나 부리는 사이비로 나오는 마도카 가쿠탄이었지만, 이 단편에서는 신흥종교 교주의 손자로 나와 어렸을 때부터 '깨달음'과 '신통력'을 놓고 번민하다가 결국 수행의 길을 포기하고 겉으로 보이는 신통력을 상징하는 '덴구의 길'을 선택한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단편 마지막에서 가쿠탄이 화려한 교주의 법의를 입는 장면을 통해 이를 표현하는데, 성실함을 추구하던 인간이 변질되는 안타까움과,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힘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겹쳐지는 수작이었다.


. 여기에 세키구치가 현기증 언덕을 걸어올라가는 교고쿠도 시리즈 첫 장면과 연결되는 '가와이카고'도 좋았고, 내 느낌으로는 너무 극단으로 치달은 느낌이었겠지만 취향에 따라서는 '모쿠모쿠렌'이나 '케라케라온나', '게조로' 같은 '무당거미의 이치' 편의 인물들이 나오는 단편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고. 사실 단편마다 편차가 있다보니 본편에서는 그냥 무난하게 지나갔던 인물이 갑자기 별다른 개연성 없이 끝없는 어둠으로 빠져가는 모습을 보이는 등 무리수인데 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사실 도불의 연회까지 다 따라온 얼마 없는(....) 독자라면, 이젠 정말 아무 기약도 없는만큼 한장 한장 아껴가면서 읽는 것 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지 않을까. :)



이윽고 - 나는 긴 언덕 아래에 섰다. 끝도 없이 적당한 경사로 완만하게 이어져 있는 긴 언덕길을 끝까지 올라가면 - 목적지인 교고쿠도다. 1952년, 장마도 끝나려고 하는 날의 일이다.


- p. 530. 가와이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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