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도연대 風 - 교고쿠 나츠히코(솔) ●●●●●●●◐○○
"불가사의하다고 여기는 것과 불가사의한 것과는 달라요, 모토시마 씨.
이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은 없어요."
"하지만 두려워하는 마음은 생긴 것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그 글을 쓴 사람과 당신이나 나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주를 받을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도 그 상자에 쓰인 글은 당신들 두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당신을 내게 오도록 한 행동까지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 상자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저주란 말입니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 p. 487. 장미십자탐정의 의혹 - '면령기'
. 앞서 읽었던 백기도연대 雨편이 각 단편을 통해 에노키즈의 활약상(?)과 그 하인(....)들의 수난사를 풀어낸 데 비해, 이번 風편에서는 각 단편이 별개의 사건인 것 같으면서도 한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다른 사건이 꼬리를 물고 벌어진다. 딸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 납치되어 가짜 살인극에 말려든 주인공, 기껏 문을 따고 들어와서는 물건을 털어가기는커녕 오히려 물건을 놓고 가는 빈집털이까지. 교고쿠도가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에노키즈가 한바탕 난장판을 만들고 시작 때까지만 해도 '범용했던' 화자가 에노키즈의 하인이 되어갈 수록 최종 흑막 역시도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데, 도불의 연회까지 읽고 이 책을 읽는다면 흑막의 정체를 보고 절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雨편에 대해 리뷰하면서 에노키즈가 벌이는 난장판 자체는 신나지만 추리라는 측면에서는 설정만 봐도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에 비하면 風편은 한결 잘 짜여진 추리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엉터리 납치극 소동인 '운외경 - 장미십자탐정의 의문' 편이 그나마 쉽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정도고, 그 앞뒤의 '오덕묘 - 장미십자탐정의 한탄'(믿기 어렵겠지만, 정말 진지한 의미의 제목이다)이나 '면령기 - 장미십자탐정의 의혹' 편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한다. 다만 백기도연대의 단편들이 그렇듯 하나같이 훈훈한 분위기로 끝나는데, 특히 시리즈의 마지막인 '면령기' 편에서 화자의 이름이 밝혀지고 에노키즈에 대해 교고쿠도가 이야기하며 끝나는 엔딩은 꽤 뭉클한 느낌을 준다.
"그 친구는 나름대로 에노키즈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답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본인도 그렇게 행세하고 있으나.... 가면을 쓰고 있는 거예요."
- p. 693. 장미십자탐정의 의혹 - '면령기'
. 아쉬운 건 마지막 편이 워낙 깔끔하고 훈훈하게 끝이 나다보니 더 이상의 후속작은 기대하기 어렵겠다 싶은 것. 아무래도 교고쿠도 시리즈 본편은 갈수록 분위기가 점점 무겁게 가라앉는데다 사람의 기억을 장면으로 떠올린다는 에노키즈의 특징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서는 너무 치트키스럽다보니 가면 갈수록 에노키즈가 활약할 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백기도연대 시리즈가 참 반가웠던 건데.... 정말 아쉽긴 하지만, 철없던 캐릭터가 철이 들어버렸으니 딱히 방법이 없지 않나. :)
"이것 보시오, 모토시마 씨. 나는 당신에게 여러 번 충고했소. 에노키즈와 같은 사람과 접촉하면 무서운 속도로 바보가 된다고 말이오. 틀림없이 바보가 됩니다. 그는 상식이라거나 양식 같은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나이에요. 그런데도 당신은 나의 친절한 조언을 무시하고 그런 바보와 어울리고 있단 말이오.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일들은 모두 그 결과란 걸 알아야 해요. 그러므로 아무리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 p. 271. 장미십자탐정의 의문 - '운외경'
"어디에 가건 또 누구를 만나건 맨얼굴이 좋은 거야. 가면을 써야 할 이유 따위는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도 너희들은 가면을 쓴단 말이다. 무엇이 부끄러우냐? 부끄러운 짓들만 하고 있으니까 수치덩어리가 되어버린 거야."
"저어.... 나는 맨얼굴로 정말 울렵니다."
마스다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 p. 555. 장미십자탐정의 의혹 - '면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