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에 대한 장난스럽지만 애정어린 변주

하드보일드 에그 - 오기와라 히로시(작가정신)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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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필립 말로로부터 고독은 악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그렇다면 이력서의 44년생이라는 건 뭐야?"

"쇼와라고는 말 안했어."

".... 서기?"

"홋홋호."

나는 손가락을 꺾어보았다. 1944년생이라면 오십 몇. 눈앞에 있는 즉신성불 같아보이는 할머니는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메이지구나." 나는 피를 토하듯 외쳤다.

"홋홋호."

"웃지 마!"

"홋홋홋호."

- p. 70.




. 뒷골목, 뜨거운 여름, 오버코트, 스냅사진. '빅 슬립'의 카멘 스턴우드를 연상하게 하는 여자(?)의 멍한 눈초리와 건조된 가루. 하드보일드 에그는 '하드보일드'라는 제목 그대로 한껏 멋을 부리며 시작한다. 한 장의 스냅 사진만을 가지고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탐정의 모습에서는 쉬이 필립 말로가 연상되지만, 소설은 단 5페이지만에 하드보일드에서 코믹 일상물로 잽싸게 장르를 갈아타고 만다. 그렇게 현대에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는 추리소설 속 탐정, 그것도 필립 말로 같은 정의감이 넘치고 우수에 찬 탐정으로 살아가기 위해 기를 쓰는 한 남자의 코믹한 모험담이 시작된다.


. 작가는 그렇게 하드보일드 물에 나오는 온갖 클리셰를 동원해가며 주인공을 '놀려먹는다'. 유부녀와의 은밀한 한때를 내심 기대하면서 필립 말로의 대사로 온갖 용을 쓰는 주인공에겐 전구를 갈아달라는 잡일이 주어질 뿐이고, 하필이면 이름부터도 'J'인 바에서는 꼬치냄비의 구수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터프한 사립탐정을 꿈꾸는 주인공에게 들어오는 일은 80%가 동물관련이고 20%가 불륜관련이기에 오늘도 거대한 이구아나를 찾아 공원 흙바닥에 무릎을 더럽히고 관리인에게 쫓겨다니면서 사건 해결을 위해 '애완동물 키우는 법 4편'을 열심히 탐독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운동 정도니, 작가의 마수에 걸려든 어눌한 주인공에게 아무쪼록 심심한 애도를. :)


. 일본소설이 한창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이런 류의 소설이 많았다. 별로 특별할 거 없는 주인공이 적당히 골탕을 먹다가 우연히 사건의 끝자락에 휘말리고, 낭패를 겪으면서 아무 대책도 없이 사건의 한가운데로 끌려들어가는 듯 싶지만 '의외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채 멋지게 추리쇼로 마무리.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코믹하고 처량한 일상 엔딩. 그래서 줄거리로만 보면 그닥 새로울 건 없지만, 여러 요소들을 빠짐없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잘 집어넣고, 여기에 하드보일드를 풍자대상으로 삼아 웃음을 끌어내려는 작가의 시도도 성공적. 덕분에 줄거리는 대충 예상이 되는데도 부분부분 코믹스러운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즐기며 지루하다는 느낌없이 재미있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여기에 왠지 와글와글 몰려다니면서 남들처럼 살아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을 뒤로 한 채 그게 꿈이라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냐고 읽는 이를 북돋아주는 것까지. 즐겁고 가볍고 훈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말로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외톨이였지만, 동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체행동과 다수결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그의 주제는 '나'였다. 나는 까까머리 속의 여드름을 짜며 경탄했다. 나는 필립 말로로부터 고독은 악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챈들러의 책을 처음 바로 읽은 다음날부터 나는 동급생을 위해 빵을 사러 뛰어가지 않았으며, 그들의 책가방을 혼자서 도맡아 드는 일도 그만뒀다. 그리고 많은 새로운 상처를 입었다.

- p.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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