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쏙 빼는 장광설을 지나자 유쾌한 활극이었다

백기도연대 雨 - 교고쿠 나츠히코(솔) ●●●●●●●○○○

by 눈시울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싶지 않을 때
대중이라는 복면을 쓰는 겁니다.



"일반대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는 단지 많은 개인이 있을 뿐이지요.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싶지 않을 때 대중이라는 복면을 쓰는 것입니다.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전가시키는 비겁한 행위란 말입니다. 예컨대 개인이 발언하면 몰매를 맞을 폭언이라도 익명성 운운하며 방패막이 뒤에 숨는 순간 일반론으로 둔갑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고유명사를 은폐함으로써 개인이 대중으로 둔갑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아무런 논의도 거치지 않고 하찮은 헛소리가 마치 민의를 얻은 정론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거예요. 당신은 일반 대중 운운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녀석들의 말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요. 행동하는 것은 당신 개인이에요. 일부러 부풀려서 대중이 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 p. 31. 나리가마 - 장미십자탐정의 우울




. 雨편과 風편 두 권으로 이루어진 백기도연대 시리즈는 교고쿠도 시리즈의 외전으로 '도불의 연회' 이후의 시점을 배경으로 하지만, 다행히 별개의 화자가 등장하는 별개의 이야기라 교고쿠도 시리즈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고는 해도 책을 읽는 데 별다른 지장은 없다. 다만 책을 읽은 독자라면 도불의 연회에 등장하는 가센코나 '철서의 우리'에 나오는 조신 스님처럼 좀 더 반가워할만한 부분들이 있고, 특히 조신 스님과 함께 등장하는 수행자의 정체는 철서의 우리의 진상과도 이어지기 때문에 가급적 철서의 우리까지는 읽은 상태에서 雨편을 읽는 게 좋다. 단 風편은 도불의 연회까지 다 읽고 난 연후에 읽어야 한다.


. 총 세 편의 중편으로 이뤄진 이 책은 교고쿠도가 아닌 에노키즈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장광설도 많이 줄었고(그렇다고 또 나오지 않는 건 아니다. 교고쿠도가 나오면 여지없이 장광설도 따라 등장한다) 그 대신 에노키즈의 수려한 외모와 호쾌한 액션과 끝없는 기행이 그 자리를 메꾼다. 그렇다보니 도불의 연회 때까지만 해도 아오키 형사와 함께 교고쿠도 시리즈 '최후의 상식인'이었던 마스다는 백기도연대 시리즈에 이르면 에노키즈의 직속 하인이자 욕받이, 바보(....) 등으로 완전히 캐릭터가 붕괴해버렸는데, 에노키즈 탐정 사무소에 있던 그 짧은 시기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진다(....) 거기에 세키구치는 도불의 연회 사건의 후유증으로 이제는 거의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느낌이고. 이 책을 읽고 다시 우부메의 여름 첫부분을 읽으면, 시리즈를 거치면서 세키구치가 얼마나 쌩고생을 했는지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바보천치들아,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가와라자키 놈아, 내가 누구냐?"

"신입니다." 가와라자키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정신이 아니다.

- p. 551. 야마오로시 - 장미십자탐정의 분개




.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에노키즈의 활약이 중심이 되다보니 교고쿠도 시리즈에 비해 훨씬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게 이 시리즈의 특징이다. 세 편의 이야기 중 두 번째 중편인 '가메오사 - 장미십자탐정의 울분' (정말 제목이 이렇다. 절로 모 라이트노벨의 제목이 떠오른다) 정도에 추리라고 할만한 부분이 약간 있는 정도고, 나머지 중편들은 설정만 봐도 사건의 전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 뻔한 전말을 있는 힘껏 비틀어서 난장판을 만들어야 속이 풀리는 게 에노키즈 식 해결법이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대체 에노키즈가 어떤 깽판을(....) 칠 지 예측하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



p.s. 이 소설은 교고쿠도 시리즈를 만화화하고 있는 시미즈 아키가 그린 동명의 만화로도 나와있는데, 퀄리티가 어마어마하니 소설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반드시 추천. 사실 개인적으로는 소설보다도 만화 쪽을 더더욱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가와라자키 군, 그렇게 긴장할 것까지는 없네."

"하지만 주젠지 님은 에노키즈 님의 친구로 장미십자단의 중심인물이 아닙니까?"

"나는 그런 저속한 단체에 가입한 일이 없어."

- p. 530. 야마오로시 - 장미십자탐정의 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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