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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09. 2024

묘한 분위기와 환상을 걷어내면 드러나는 간명한 진실

마술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당신이야말로 현실을 잘 깨닫고 있었어.
환상이 아니라 말이야.
우리들 대부분이 환각에 넘어갔는데도 당신은 절대 환각에 속지 않았지."



   "그러니까 무대장치 역시 현실에 있는 물건들 - 캔버스라든지 목재, 그림물감, 마분지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는 것 아닙니까. 환상이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 것이지 무대장치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내 말은 무대장치란 관객 눈앞에도 실재하지만, 무대 뒤에서도 역시 실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p. 250.




   .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추리소설은 충분히 많다. 아니, 모든 추리소설은 어떤 형태든 간에 불안을 필수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중에서도 '비뚤어진 집'이나, '끝없는 밤'처럼 작품 내내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좋은 작품들이 있고, 그런 작품들에 비하면 이 소설은 영 심심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얼핏 보면 마플 양이 어린 시절 친구인 루스 여사의 부탁을 받고 그녀의 동생이자 역시 어린 시절의 친구인 캐리 루이즈를 찾아갔다가 때마침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전형적인 스토리 라인에 크리스티 여사 특유의 적당한 로맨스가 더해지는 평범한 이야기로 읽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그동안의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바로 마플 양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 물론 크리스티를 읽지 않은 - 그 중에서도 마플 양 시리즈를 읽지 않았다면 탐정이 사건에 휘말려 혼란스러워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싶겠지만, 마플 양 시리즈의 독자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마치 강백호의 평범한 골밑슛을 보고 전호장이 기겁하는 것처럼. ^^) 크리스티 월드라는 게 있다면 'Natural Good' 정도의 캐릭터에 해당 될 마플양이기에 그녀가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뜨개질을 하거나 뜨개질을 빙자해 끝없는 수다를 들으며 - 사실 놀랍게도, 마플 양은 수사의 도구로 수다를 사용할 때를 빼고는 그렇게까지 말이 많은 캐릭터는 아니다!! (^^;) 여유있고 초연하게 사건을 바라보며 통찰력을 발휘하는 게 그녀의 모습이었다. 


   .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마플 양은 몇십년만에 만난 소녀시절의 친구인 캐리 루이즈에 대한 애정으로 사건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몇 번의 결혼과 사별로 인해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순수해보이는 친구의 모습과, '소년원이 딸린 대저택'으로 상징되는 그녀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 그 과정에서 캐리를 위협하는 듯한 사건이 발생하고 모두가 이를 우려하는데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태연자약한 캐리의 모습. 그런 위화감은 점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고,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인물들은 현실이라기보단 마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저택은 이들의 연기를 위한 무대장치처럼 느껴진다. 마플양조차도 한동안은 이 무대에서 어떤 역을 맡아야 하는지 영 갈피를 잡지 못한다. 


   . 결국 사건 후반에 가서야 마플 양이 인물들 각자에게 씌워진 캐릭터를 하나씩 벗겨내고, 그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은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닌 본질 그대로의 인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며 사건은 자연스럽게 풀리고, 마플 양 역시 냉정한 통찰력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제야 여느 때같은 훈훈함으로 가득한 엔딩. :) 사건이나 트릭이야 미스테리에 익숙하다면 오히려 다른 트릭을 생각하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알 듯 모를 듯 묘한 느낌이 들고, 이를 통해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불안정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지나는 옆자리에 앉은 마플 양을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우리 할머니랑 같은 학교를 다니셨다죠? 그것 참 묘한 일이네요." 

   마플 양은 그녀의 말뜻을 다 알아들었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흔히 이런 노인들도 한때는 젊은 아가씨였으며, 갈래머리를 하고 소수점 계산이며 영문학 같은 것에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게 마련인 것이다." 

                                                                                                                                                            - 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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