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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May 18. 2024

당신에겐 어둠이 보이는지, 어떤 어둠을 보고 있는지

메롱 - 미야베 미유키(북스피어)  ●●●●●◐○○○○


   "분명히 그런 모습의 망자가 보였어요. 하지만 여보, 오린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내게 망자가 보인 이유는 내 마음에도 가엾은 덥수룩이 무사님과 같은 어두운 거리낌이 있기 때문이에요. 무사님은 어두운 마음 때문에 망자가 되었어요. 나는 다행히 아직 살아 있으니 망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두운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오유 씨에게도 덥수룩이 씨가 보였어요." 오린이 말했다. "역시 같은 어두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사람이 망자를 보는 거예요." 오사키는 상냥하게, 마치 어린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시치베에에게 말했다.

   "여보, 당신은 어릴 때부터 많은 고생을 해 왔지요. 지금까지 인생은 결코 편한 길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 속에서 당신은 한 번도 남을 원망하거나, 계략에 빠뜨리거나, 자신을 좋게 봐 준 사람을 배신하는 짓을 하지 않았어요. 성실하게, 정직하게, 오히려 서툴 정도로 곧게 살아왔지요. 그런 사람의 눈에는 망자가 비치지 않아요." - p. 481.   




   . 이 책. 하여간 두껍긴 엄청나게 두껍다. 558페이지라고는 하지만 이정도로 두꺼울 일인가 싶은데, 재생용지를 써서 그런지 두께가 무슨 법률서적 수준이다. 이전에 읽었던 '얼간이'가 분량으로는 더 많긴 했었지만 워밍업(?)을 위한 단편이 두세편 정도 있는데다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이고, 추리 쪽의 비중이 높다보니 그다지 길다는 생각 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는데 이 책은 시작부터 바로 본 이야기에 들어가는데다 추리보다는 괴담의 비중이 더 높고, 그렇다고 '외딴 집'처럼 눈을 확 끄는 사건이나 긴박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두꺼운 책이 더 두껍게 느껴진다. :) 


   .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귀신을 볼 수 있는 오린이라는 여자아이와 그 가족들이 후네야라는 가게에 입주해 요릿집을 열지만 그 집에는 이미 성불하지 못한 귀신이 다섯이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덥수룩이'라는 귀신이 연회에서 난동을 피워 가게가 곤경에 빠지자 오린은 귀신들이 성불하지 못하고 망령으로 남은 이유를 찾기 위해 훈남 무사귀신인 겐노스케와 미녀귀신인 오미쓰와 함께 근처의 불탄 절에서 일어났다는 과거의 사건을 파헤친다는 이야기이다. 줄거리 자체로만 본다면야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같은 단편으로 충분할 듯한 간단한 이야기지만, 여기에 귀신소동을 수습하기 위해 벌어진 엉터리 귀신대회와 귀신대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재와 과거의 살인사건에 벌써부터 나쁜남자 기미가 엿보이는 근처 동년배 소년과의 미묘한 감정까지. 하여간 미미 여사(미야베 미유키^^;)께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데 신나서 붙일 수 있는 살은 몽땅 붙여버린 느낌이다. 


   . 그렇게 이 작품은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나 '괴이'처럼 요괴를 통해 인간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어둠을 그려낸다. 미미 여사의 요괴들은 인간의 어둠을 상징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 역시 욕심이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집착, 외로움, 그리움 등 각각의 어둠에 상응하는 요괴와 마주한다. 하지만 미미 여사는 그렇게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는 섬뜩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읽는 이에게 희망을 전해주려 한다. 이 작품에서도 모두가 요괴에 휘둘리는 가운데 홀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시치베에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한평생 올곧게 살아온 그의 모습을 통해 미미 여사는 어둠 속에서도 끝까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수많은 어둠을 그려내면서도 미야베 미유키가 끝까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최후의 고집이자 위안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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