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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May 12. 2024

냉정하게 그려내는 일상은, 그 자체로 하드보일드가 된다

녹슨 도르래 - 와카타케 나나미(내친구의서재)  ●●●●●●◐○○○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일 선택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시 선택한다. 선택한 끝에 일어난 일에 대해 혹자는 자신의 선택을 칭찬하고, 혹자는 후회한다. 그리고 다시 선택한다. 

   그 해 11월은 유난히 세찬 바람이 불었고 한겨울처럼 차갑게 식었다. 각지에서 정전이 발생해 동사자까지 나왔다. 그 지독한 추위 속에서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몇 가지의 선택을 했다. 그 결과, 아오누마 히로토와 만나 한 지붕 아래 살았다. 이미 많은 이들이 선택을 마쳐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었던 그 때, 내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든 그 회전을 멈출 수는 없었으리라. 

   ....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내게 구원은 없다. 

                                                                                                                                                              - p. 6.




   . 솔직히, 1/4부터는 이야기의 흐름을 거의 따라잡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엉망인 남자에게 일방적인 연애감정에 빠진 엉망진창인 할머니를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할머니를 미행하던 하무라 아키라는 뜬금없이 할머니들간의 싸움에 휘말리고, 계단에서 떨어진 할머니들에 깔려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 곳에서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해 가벼운 기억상실 증세에 빠진 채로 재활치료를 하던 할머니의 손자와 만나게 되고, 어찌저찌 - 정말 어찌저찌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지리하고 곡절많은 과정이었다 - 계단에서 하무라를 깔아뭉갠 덕분에 살아난 할머니(이 분은 사랑에 빠진 할머니와 싸우던 쪽이다)의 제안을 받고 빌라의 빈 집에 살면서 아랫집에 사는 손자의 활동보조인과 싸움 사건의 중재인과 헌책 인수인을 겸하게 된다. 이 책까지 순서대로 하무라 아키라 2기를 따라온 독자라면 알겠지만, '이별의 수법'에서 하무라가 살던 셰어하우스는 폭파(진짜 펑 터지는, 영화에서 나오는 그 폭파)되었으니까(....) 


   . 이정도로 정신없는데도 불구하고 여기까지가 전체 분량의 1/4에도 못미치는 지점이고, 나머지 3/4에도 계속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그 모두는 길고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든 다른 인물들과 얽혀 있다. 와카타케 나나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뼈대에 끊임없이 가지를 종횡으로 늘려가고 하무라 아키라는 악전고투하며 작가가 펼쳐놓은 숲을 끈질기게 헤치고 나아가지만, 정작 이야기를 읽는 나는 진작에 나무들 사이에 끼어버린 채로 옴짝달싹 못한터라 결말을 보고도 그래서 그게 누구고 어디 나왔던 얘긴데 하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 다만 그렇게 간신히 이야기를 더듬어가면서 알 수 있었던 건, 와카타케 나나미와 40대의 하무라 아키라는 하드보일드 장르에 안착한 것을 넘어 이제는(특히나 하라 료가 별세한 지금에 와서는 더욱)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하드보일드라면 으레 있어야 할 것 같은 독한 술 없이도, 담배 연기 한 줄 피워올리지 않고도, 그럴싸한 설교는 물론이고 주먹 한 번 날리지 않은 채 막막하고 먹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야기는 그 어떤 하드보일드보다도 차갑고 냉정하며, 거기에 어떤 수식도 붙이지 않은 채 눈앞에 쌓인 것들을 그저 묵묵히 헤쳐내는 하무라 아키라는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매력적이다. 




   메밀국수를 먹고, 목욕탕 청소를 끝내고, 부엌 정리를 도왔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최근 유행한다는 버리지 못하는 부모와 버리고 싶은 딸의 대리 전쟁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무라, 이 냄비 쓸 생각 없어? 금은 갔지만, 이 크기라면 스모 선수와도 함께 둘러 앉아 먹을 수 있어." "그럴 예정은 없습니다." "그럼 우리 집에 놔두지. 이 야마나카 칠기는? 가운데에 흠집이 있지만." "말씀 감사하지만, 사용하지 않아서." "이것도 우리 집에 놔둘까. 그럼 이 나무젓가락 묶음은? 설거지 안 해도 되잖아. 가져가." "나무젓가락 포장지의 가게 전화번호가 아홉 자리네요. 그렇단 말은 30년이 지났단 말이니 버릴게요." "무슨 짓이야. 아깝게." "이걸 입에 넣으란 말인가요?" "요즘 젊은 것들은 정말로 아까운 줄을 모른다니까. 이 나무 주발 정도는 가져가. 봐, 뚜껑도 있고 예쁘잖아." 뚜껑을 여니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 p. 99. 물론 일상물의 일인자인 것도 여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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