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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10. 2024

괴이와 협잡과 칼부림이 난무하지만, 사랑 이야기입니다.

엿보는 고헤이지 - 교고쿠 나츠히코(북스피어)


그것은 - 옛날을 버리고 지금을 골랐을 뿐.



   "인연, 이라는 것일까요."

   "우연이야."

  인연이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여자는 으르렁거린다.

   "사람은 말이지."

   여자는 고개를 틀어 정원을 본다. 하얀 목덜미가 햇빛에 요염하게 빛난다.

   "잘 만들어진 우연에 나중에 해석을 갖다붙여서 인연이라고 부르는거지. 시시하잖아. 나와 고헤이지는 덧없는 관계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그저 같이 살고 있을 뿐이야. 그뿐. 나는 녀석을 싫어하고, 그러니까 그 녀석의 마음 따윈 헤아릴 수 없어. 그래도 같이 살고 있지."

   "같이 - 살고 있다."

   "살고 있어."

   여자는 하기노스케의 등 뒤로 갸름한 눈을 스윽 향했다.

   "나는 - 가센을 버리고 고헤이지를 택했어. 그것은 - 옛날을 버리고 지금을 골랐을 뿐."

   하기노스케는 더 이상 등 뒤의 오한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돌아볼 수 없다. 무섭다. 몹시 무섭다.

   - 이것은.

   시선이다.

   살짝 고개를 튼다. 시야 끝에 옆방이 들어온다.

   - 보고 있다. 저.

   틈으로.

   엿보고 있다.

   제 말을 했기 때문에.

   스윽.

   저것은 장지가 열리는 소리일까.

   착각하지 마라, 고헤이지 - 하고 갑자기 여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를 선택했지만, 좋아서 선택한 것은 아니야. 결코 좋아했던 게 아니라고.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나라가 망하든 천지가 뒤집히든, 결단코 너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을 테니 - "


   계속, 계속, 언제까지나.

   나는 너를.

   끔찍하게 싫어해.


   여자가 그렇게 말한 후.

   조용히, 조용히 장지가 닫히는 소리를 하기노스케는 분명히 들었다.

   그래도 좋은 것일까.

   더는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슬픈 기분이 들어서 -

   하기노스케는 뒤를 보지 않고 떠났다.

- p. 420-421. 엿보는 고헤이지   




   . 존재 - 라기보다는 세상과의 경계를 이루는 선이 극도로 흐릿한 남자와,

     세상을 울분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모든 선을 베어버리는 남자.

     무뢰배라 자신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텅 비어있을 뿐인 남자.

     아름답게 포장된 과거만이 남았을 뿐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남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숨쉬고 원하고 울고 웃고 소리치고 집어던지고 발을 구르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여자. 그런 그녀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



   . 세상과의 경계가 극도로 흐릿한 한 남자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해서 증오와 칼부림과 협잡이 난무하는 이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해서 그저 먹먹하게 쓴웃음과 한숨을 짓게 만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지는 책을 전부 읽어야만 알 수 있다. 그동안 죽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고 감상을 써왔지만, 이 이야기에 대해서만큼은 대체 어떻게 줄거리를 얘기해야 할 지 아무런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단 한 줄이라도 더 옮겨적는 쪽을 택했다. 소개도 전달도 할 자신은 없지만 그저 다른 사람도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이런 책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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