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우연에 나중에 해석을 갖다붙여서 인연이라고 부르는거지. 시시하잖아. 나와 고헤이지는 덧없는 관계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그저 같이 살고 있을 뿐이야. 그뿐. 나는 녀석을 싫어하고, 그러니까 그 녀석의 마음 따윈 헤아릴 수 없어. 그래도 같이 살고 있지."
"같이 - 살고 있다."
"살고 있어."
여자는 하기노스케의 등 뒤로 갸름한 눈을 스윽 향했다.
"나는 - 가센을 버리고 고헤이지를 택했어. 그것은 - 옛날을 버리고 지금을 골랐을 뿐."
하기노스케는 더 이상 등 뒤의 오한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돌아볼 수 없다. 무섭다. 몹시 무섭다.
- 이것은.
시선이다.
살짝 고개를 튼다. 시야 끝에 옆방이 들어온다.
- 보고 있다. 저.
틈으로.
엿보고 있다.
제 말을 했기 때문에.
스윽.
저것은 장지가 열리는 소리일까.
착각하지 마라, 고헤이지 - 하고 갑자기 여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를 선택했지만, 좋아서 선택한 것은 아니야. 결코 좋아했던 게 아니라고.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나라가 망하든 천지가 뒤집히든, 결단코 너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을 테니 - "
계속, 계속, 언제까지나.
나는 너를.
끔찍하게 싫어해.
여자가 그렇게 말한 후.
조용히, 조용히 장지가 닫히는 소리를 하기노스케는 분명히 들었다.
그래도 좋은 것일까.
더는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슬픈 기분이 들어서 -
하기노스케는 뒤를 보지 않고 떠났다.
- p. 420-421. 엿보는 고헤이지
. 존재 - 라기보다는 세상과의 경계를 이루는 선이 극도로 흐릿한 남자와,
세상을 울분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모든 선을 베어버리는 남자.
무뢰배라 자신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텅 비어있을 뿐인 남자.
아름답게 포장된 과거만이 남았을 뿐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남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숨쉬고 원하고 울고 웃고 소리치고 집어던지고 발을 구르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여자. 그런 그녀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
. 세상과의 경계가 극도로 흐릿한 한 남자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해서 증오와 칼부림과 협잡이 난무하는 이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해서 그저 먹먹하게 쓴웃음과 한숨을 짓게 만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지는 책을 전부 읽어야만 알 수 있다. 그동안 죽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고 감상을 써왔지만, 이 이야기에 대해서만큼은 대체 어떻게 줄거리를 얘기해야 할 지 아무런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단 한 줄이라도 더 옮겨적는 쪽을 택했다. 소개도 전달도 할 자신은 없지만 그저 다른 사람도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이런 책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