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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14. 2024

추리를 위한 전쟁물이 아닌, 전장을 말하기 위한 추리물

전쟁터의 요리사들 - 후카미도리 노와키(아르테)  ●●●●●●●○○○  


움직인 덕에 살 수 있었다.
움직인 탓에 죽었다.
전쟁터에서 선택지는 너무 많은데 실수의 대가는 너무 크다.



   고참과 신참은 금세 친해지기 어렵다. 하지만 고참에게는 신참을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복잡한 자부심과 더불어, 햇병아리를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말로는 "비실비실한 애송이는 금방 죽는다니까" 하고 투덜거리면서 실제로 부하가 죽으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기혐오와 갈등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고참은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참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럴 수만도 없다.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사이에 서로를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좋아, 이 녀석은 이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됐으니 우리 동료다'라고 확신한 순간 기껏 성장한 신참의 머리통이 폭격에 날아간다. 

                                                                                                                                               - p. 345. 유령들




   . 제목을 보고서는 당연히 코지 미스테리일거라고 생각했다. 팍팍한 전선 한복판이지만 그 와중에도 인간미와 위트를 발휘하는 동료들 사이에 군침이 도는 요리들과 레시피들이 열거되고, 요리를 통해 위로를 주는 만화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그렇잖아도 최근 나오는 드라마건 소설이건 죄다 코지 미스테리 열풍에 한몫 얹으려는 이야기들인데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의 신인작가에, 거기다 무엇보다도 제목이 '~ 요리사들'이니 더더욱. 


   . 아니나다를까, 처음 100여쪽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전형적인 코지 미스테리가 펼쳐진다. '집에서 만든 마요네즈와 새콤달콤한 피클을 사용한 데빌드 에그, 프라이드 애플과 스콘과 요크셔 푸딩, 냉육과 민물고기 프라이'처럼 신나서 음식을 늘어놓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닭고기 육수 깡통, 터무니없이 많은 양파와 감자, 연유와 정킷 상자, 뭔가의 기름, 밀가루 깡통, 스파이스 세트, 잘게 썬 피망 깡통, 콘비프, 쇼트닝' 등등 음식으로만 한 문단을 채워간다. 거기에 주인공이 마주치는 첫 사건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공수대원들의 낙하산이 어딘가로 모아져 가버린 이유니까. 


   . 하지만 첫 이야기의 말랑말랑한 진상이 풀리기가 무섭게, 역시나 코지 미스테리였다고 끄덕거리기가 무섭게 갑자기 전쟁이 훅 들이밀어진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이 작가는 추리소설을 쓰기 위해 전쟁터를 빌려온 게 아니라, 쉬이 읽히는 전쟁 이야기를 쓰기 위해 추리를 가져온거구나. 




   자정이 지날 무렵 독일군 폭격기 두 대가 날아와 구호소에 폭탄을 투하했다. 부상병은 대부분 피난한 뒤였지만 저택에는 아직 사람이 남아있었다. 브라이언을 포함한 의무병 여덟 명과 도와주러 와 있던 주민 여자 네 명, 그리고 완고했던 저택 주인이 파편에 깔려 죽었다. 사망한 프랑스인 중에는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던 또 한 명의 젊은 여자와 영어가 유창했던 미인 욜랑드 씨도 있었다고 한다. 모은 낙하산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도 라이너스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 p. 121. 노르망디 공수작전 




   . B.O.B. 밴드오브브라더스의 루트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매 장마다 미스테리를 하나씩 던지고, 그 미스테리가 풀릴 때마다 읽는 이는 전쟁의 참혹한 모습과 맞부딪친다. 그것은 무능하며 출세만을 쫓는 상관에 대한 항명이기도 하고, 지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절규이기도 하고, 해방의 기쁨과 환호 뒤편에서 벌어진 일반인들간의 가혹한 린치이기도 했다. 거기에 처음부터 이 이후의 이야기는 없다는 듯 어떤 여지도 남겨두지 않은 채 차례차례 2차대전의 매 장면을 가져오는 작가의 손끝은 매서웠고, 사건이 하나씩 풀려나갈 때마다 과연 이 뒤에는 어떤 참혹함이 있을지 두려워질 정도였다. BOB를 너무 그대로 본따오지만 않았으면 - 마지막 부분에선 이러다가 야구하는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이보다 더한 호평도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단순한 코지 미스테리를 훌쩍 넘어선 만족스러운 이야기였다. 




   메인 디시인 소시지와 사과 링 구이를 나이프로 썰자 소시지에서 육즙이 흘러나와 구운 사과에 스며들었다. 침이 입 안 가득 고였다. 나이프에 힘을 주어 사과를 세모꼴로 썰고 소시지와 함께 포크로 찍었다. 입으로 가져가자 황설탕과 소시지의 달콤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에 구운 사과 특유의 새콤함과 향기가 가미되어 입 안에서 살살.... 녹지는 않지만, 군 기지에서 먹는 음식으로는 최고 수준의 맛이었다. 역시 내가 마지막으로 맛을 낸 게 정답이었다. 팔을 델 뻔한 보람이 있었다. 

                                                                                                                 - p. 144. 군대는 위장으로 행진한다


   "재수가 좋았군, 키드. 조금만 빗나갔으면 뇌를 직격했을거다." 그 때 나는 입사로 소총을 쏘다가 서 있던 곳이 불안정해서 다치기 직전에 약간 움직였다. 총알은 내 눈앞의 돌을 맞히고 튀어나와 파편이 광대뼈 위의 살을 도려냈다. 움직인 덕에 살 수 있었다. 움직인 탓에 죽었다. 전쟁터에서 선택지는 너무 많은데 실수의 대가는 너무 크다.

                                                                                                                                               - p. 334.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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