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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11. 2024

휘몰아치는 서사와 비극적인 운명의 대단원

풀잎관 - 콜린 맥컬로(교원문고)  ●●●●●●●●●●


"아직은.... 끝나지.... 않았네. 일곱 번이라고 그랬어."



   "여기에 아주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스카우루스가 말했다. 

   "내 생애 내가 얼마나 많이 그를 저주했는지는 오직 신들만이 알고 계십니다! 내 생애 차라리 그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내가 얼마나 많이 바랐는지는 오직 신들만이 알고 계십니다! 내 생애 내가 얼마나 여러 차례 그의 최고의 적이었던가는 오직 신들만이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더 빨리 빠져 달아나고 내 목숨이 점점 갸날프고 약해질수록, 내가 애정으로써 기억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단지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온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이 축적되어 감에 따라 누가 애정으로써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 그럴 가치가 없는지도 말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 중에 지금 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반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 와서는 무한한 애정을 느끼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마리우스가 눈을 반짝이며 자기를 쳐다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스카우루스는 돌아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랬다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 같았다. 이 일장 연설은 가슴 속에서 나옴과 동시에 바로 그의 장난기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장난기가 드러나면 몹시 난처해질 위험이 있었다. 

                                                                                                                                                    - 3권, p. 45.




   . 역사로서도, 이야기로서도 완벽하다. 전편에서는 빛나고 공명정대한 인물이었지만 점점 운명과 욕망에 농락당해 변해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드디어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어둠에 깊이 삼켜져 가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모습이 엇갈리고, 이탈리아 전체를 뒤흔든 내전과 지중해 동부를 휩쓴 미트라다테스의 침공이 마리우스와 술라를 역사의 전면에 다시 한 번 밀어올린다. 


   . 여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스카우루스 같은 1부의 중심 인물들이 하나 둘 장렬하게 퇴장하는 가운데 향후 시리즈의 중심이 되는 -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인물들이 등장해 그 아쉬움을 메운다. 어린시절부터 '완벽' 그 자체인 카이사르와, 전혀 다듬어질 생각도 하지 않는 쌩날것의 느낌을 주지만 그게 더없이 사랑스럽고 유쾌한 소년 폼페이우스, 자부심과 열등감이 뒤엉킨 가운데 명성에 대한 야심을 동력으로 삼아 나아가는 키케로, 그리고 아직은 열심히 악만 쓰고 있는(^^;) 꼬마 카토까지.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이 2부는, 로마가 겪는 변화와 갈등을 조망하는 역사적이고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개개의 인물들이 겪는 몰락과 영광, 빛과 어두움의 일대기를 다루는 미시적인 이야기로서도 완벽하다. 




   스카우루스는 기소에 응하여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나타났다. 프라이텍스타 토가를 입은 그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과 권위가 후광처럼 강하게 풍겼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퀸투스 바리우스가 이탈리아인들에 관한 그의 잘못을 장황하게 열거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바리우스가 마침내 말을 마치자 스카우루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배심원 대신 청중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들으셨습니까, 시민 여러분?" 스카우루스가 우레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페인의 수크로 출신으로 벼락 출세한 잡종이 원로원 의장인 스카우루스를 반역죄로 고소했습니다. 이 스카우루스는 혐의를 부정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믿으시겠습니까?" 

   "스카우루스, 스카우루스, 스카우루스!" 

                                                                                                                                                    - 3권, p. 21.




   . 1부에서 무려 여섯번이나 집정관을 차지하며 명실상부 한 시대의 일인자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추종세력을 모두 잃고 이제는 권력에서 멀어진 마리우스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권력의 근처에 다다르지 못한 채 천천히 퇴색되어 가고 있는 술라. 비록 그들에게는 아직도 '일곱번째 집정관'에 대한 예언과 '풀잎관'의 환상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 환상을 믿기에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고, 그들 스스로도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었다. 


   . 그런 상황에서 전편의 핵심이었던 '귀족과 평민'의 갈등은 이제 '로마와 이탈리아'의 갈등으로 번져간다. 여러 전쟁터에서 보조병으로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이탈리아인들은 여전히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했고, 로마인과의 차별 역시도 여전했다. 시민권을 달라는 이탈리아인들의 거센 요구에도 마리우스, 술라, 드루수스처럼 전장에서 목숨을 걸었던 경험이 있는 몇몇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완강했고, 결국 차별은 갈등이 되고 갈등은 증오가 되며, 증오는 피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 피는, 마리우스와 술라가 다시 한 번 권력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그 날은 술라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51세의 나이로 마침내 한 전장을 완전히 책임진 장군으로서, 총사령관으로서 벌인 최초의 커다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얼마나 압도적인 승리인가! 적의 피로 흠씬 뒤덮인 나머지 그의 몸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검은 핏덩어리가 땀내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그의 오른손에 들러붙어 있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전쟁터를 둘러보고는 머리에서 투구를 벗어 공중으로 던지며 엄청난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귓가에 죽어가는 삼니움 병사들의 비명과 신음소리를 뒤덮는 커다란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져 함성과 같은 구호가 되었다. 


   "개-선-장-군! 개-선-장-군! 개-선-장-군!" (중략) 


   그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인 백인대장이 술라를 향해 두 손을 쳐들었다. 그의 손에는 전쟁터에서 뜯은 풀잎들로 급히 엮은 것이 들려 있었다. 뿌리와 흙과 이파리 그리고 피가 뒤섞인 충충하고 누덕누덕한 원형의 물건이었다. 풀잎관! 코로나 그라네미아! 코로나 옵시디오날리스! 

                                                                                                                                         - 3권, p. 296, 299.




   . 그렇게 다시 한 번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 둘이지만 이제 더 이상 둘의 관계가 1부처럼 사적으로는 좋은 협력자이자 친구, 군사적으로는 뛰어난 스승과 착실한 제자일 수는 없다. 마리우스와 같은 편으로 남기에 술라는 너무 성장했고, 무엇보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로마의 일인자' 자리는 단 하나뿐이기에. 이제 술라는 고개를 돌려 그동안 하나하나 정적을 처단해왔던 그의 이빨을 마리우스에게 박아넣으려 하고, 마리우스 역시 술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정공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둘이 선택한 방법이 어떤 것이건, 그것이 무엇을 불러오건 간에 이제는 둘 다 운명이 이끄는대로 치달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둘을 - 특히 마리우스를 기다리고 있는 비극적인 운명의 종지부와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휘몰아치는 이야기는, 그 어떤 고전의 걸작과 비교해도 읽는 이를 전율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뇌졸중이야." 마리우스가 웅얼거렸다. 

   술라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 마리우스의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껴안았다. 이제야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이제야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아, 내 가여운 노장군님!" 술라는 자기의 뺨을 마리우스의 뺨에 갖다 부비며, 입술을 뚝뚝 떨어지는 마리우스의 눈물에 갖다댔다. "내 가여운 장군님! 마침내 끝장이 났군요." 무섭게 뒤틀리기는 했으나, 얼굴을 맞대고 있어 분명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네. 일곱 번이라고 그랬어." 

                                                                                                                                                  - 3권, p.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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