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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03. 2024

혼미한 시대를 헤쳐나와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로마의 일인자 - 콜린 맥컬로(교원문고)  ●●●●●●●●●◐


"나는 세계의 왕이 되느니 차라리 로마의 집정관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로마의 최하층민들로 이루어진 저 거대한 바다의 물결을 릭토르단이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자부심이 가득 차 올랐다. 옛것에 대한 자부심, 654년 동안이나 이어져 내려온 관습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그의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 전통은 너무나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약간의 파스케스를 어깨에 매는 것과 같은 노력만으로도 게르만족의 침입보다 더 강력하게 저들의 마음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줏빛 띠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토가를 입고 연단 위에 서 있는 마리우스는, 단지 이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찍이 이 지구상을 거닐었던 그 어느 왕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군대도 없고,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으며, 장검을 찬 호위병도 거느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저들은 단순한 권위의 상징물만을 보고도 옆으로 비켜 서 주는 것이다. 상징물이라야 약간의 파스케스와 토가를 장식한 별볼일 없는 자줏빛 테두리가 전부인데도 말이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세계의 왕이 되느니 차라리 로마의 집정관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 4권, p. 260.




   .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35년,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10년. 기존의 체제가 유지되고 평화가 이어지면서 로마는 빠른 속도로 무기력해져 갔다.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인해 서지중해를 장악하고 그리스에까지 진출하긴 했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가 지켜야 할 것들과 싸워야 할 적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고, 고여있는 로마의 체제와 인물들로는 새로운 적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죽은 한니발이 알았더라면 어이없어했을 정도로 로마의 패배는 계속되어갔다. 더구나 계속되는 패배는 단순히 로마의 위신이 깎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군대와 사회를 지탱하는 시민들에게 있어 패배는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계속 늘어나자 병역의무를 진 '일정 이상의 재산이 있는' 평민들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어갔고, 이에 따라 군사 지휘권을 가진 귀족들에 대한 평민들의 분노와 불신은 팽배해져 갔다. 


   . 이런 상황에서 하나 둘 이질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평민 출신이지만 그 능력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전쟁의 천재 가이우스 마리우스, 수려한 외모와 끝을 알 수 없는 욕망, 명문 귀족의 혈통을 가졌으면서도 밑바닥까지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제는 평민만도 못한 삶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로마 제일의 명문귀족이면서도 이제는 노쇠한 -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쇠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그 카이사르'의 할아버지이다)까지. 그렇게 마리우스와 술라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카이사르가 마리우스에게 손을 내밀면서, 80여년에 걸친 장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때! 한 사나이가 마리우스의 눈에 띄었다. 아직 젊지만 완숙해보이는 사나이가 기사들 주위에 서 있었다. 그 사나이는 토가를 입고 있었지만, 그가 입은 튜닉은 오른쪽 어깨 위에 줄무늬가 있는 기사용 튜닉은 아니었다. 그 젊은이는 그곳에 얼마 머무르지 않고 카피톨리누스 언덕길을 내려가 포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마리우스가 그 남자의 특이한 회백색 눈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이글이글 타오른 채, 혈안이 되어 피가 흐르는 광경을 마치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는 것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마리우스는 한 번도 그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 마리우스는 그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확실히 시시한 녀석은 아니다. 남성적이면서 동시에 여성적인 미모를 갖춘데다, 피부색도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유처럼 하얀 피부에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머리털을 지닌 그는 한마디로 아폴로 화신 그 자체였다. 그는 정말로 아폴로의 화신인가? 아니다. 방금 사라진 청년과 같은 눈을 가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눈은 교통을 겪은 자의 눈이었다. 그리고 고통을 겪었다면 신이라는 존재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 1권, p. 38.




   . 마리우스와 술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카이사르를 거쳐 아우구스투스에 이르는 80여년을 다루는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지만, 같은 시리즈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리우스와 술라의 이야기와 그 이후가 차이가 나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인지도로 보면 뒤로 갈수록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키케로, 카토 같은 어마어마한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정교함도, 극적인 측면도 초반부에 미치지 못한다. 하다못해 드디어 정점에 올랐지만 늙고 추해져버린 술라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절해서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의 최후를 맞는 3부만 해도 극적인 부분은 한껏 고조되어 있을지언정 이야기를 정교함에선 아쉬움이 느껴졌을 정도니, 그 뒤의 이야기들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그에 비해 1부와 2부엔 마리우스와 술라를 비롯해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던 스카우루스와 루푸스, 율리아와 율릴라 자매, 드루수스와 리비아 드루사, 데쿠미우스와 아우렐리아 같은 인물들이 서로 이곳저곳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자아내고, 그 이야기들이 하나 둘 얽히면서 소소한 가십처럼 느껴졌던 개인사는 어느 새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이어진다. 이런 과정을 보고 있자면 콜린 맥컬로 여사가 얼마나 이 소설의 구상을 위해 공을 들였을지, 무엇보다 여사 스스로가 얼마나 신이 났었을지(^^;) 짐작이 간다. 주인공도 있고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도 있지만, 누구 하나 일방적으로 끌어가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흐름을 이어나가는 구성은 이 소설을 더없이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 (어차피 역사니까) 스포를 좀 해보자면,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1부는 주인공인 마리우스가 '상징적인 영웅'이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타고난 군인이었던 마리우스는 전쟁에서의 계속되는 승리로 인해 로마 시민들의 영웅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가장 빛나는 그 자리에서 스카우루스로 대표되는 원로원파들과 타협하면서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디는 걸 포기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우스가 가장 찬연하게 빛나던 장면이야말로 그가 밝은 곳에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풀잎관'에서 점점 어둠에 함몰되어 갈 마리우스와, 반대로 점점 권력의 중심으로 나오게 될 술라가 교차하는 지점이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자리에 섰을 때, 그 둘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 동안은 누가 일인자가 될까요? 스카우루스? 카툴루스?" 술라가 물었다. 

   "아무도 안 돼!"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목청껏 웃었다. "아무도 못 될 걸세. 자네를 능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네!" 술라도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서 마리우스의 등 뒤로 오른팔을 돌려 순수한 애정으로 그를 꼭 껴안았다. 

   술라는 마르티우스 평원의 투표소를 떠나 귀갓길에 올랐다. 그들 앞에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이 우뚝 솟아 있었다. 싸늘한 태양의 빛줄기가 최고신인 유피테르 신전 꼭대기의 금박을 입힌 '승리의 사두마차' 위에 내려앉아 로마시를 눈부신 황금색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군!" 

   술라는 외쳤다. 그러나 그는 그 빛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 4권, p.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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