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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30. 2024

포와 도일 사이, 윌키 콜린스가 있었다

윌키 콜린스 - 윌리엄 윌키 콜린스(현대문학)  ●●●●●●○○○○


난 계속 방랑하고, 방랑하고, 또 방랑해야 해.



   "그럼 누구? 그녀는 어떻게 생겼죠? 

   그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잔뜩 쉬고 허허로운 목소리가 조금씩 부드러워지면서 슬프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젊고, 하얀 피부에 슬픈 얼굴이지. 눈은 다정하고 친절해.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또렷하고. 젊고 사랑스럽고 착하지. 이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지만 그녀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어. 난 계속 방랑하고, 방랑하고, 또 방랑해야 해. 쉬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집도 없이 그녀를 찾을 때까지 계속 그래야 해! 얼음과 눈을 넘어서, 바다를 건너고, 땅을 지나, 밤낮으로 깨어서 그녀를 찾을 때까지 방랑하고, 또 방랑하고, 또 방랑해야 해!" 

                                                                                                                                       - p. 540. 얼어붙은 땅




   . 1840년대 초중반에 에드거 앨런 포가 갑자기 나타나서 내일 당장 신인작가 타이틀을 걸고 나와도 아무 위화감 없이 대상을 받을 정도의 세련된 추리소설을, 그것도 정통추리와 안락의자 탐정, 암호와 논리추리에 이르기까지 장르별로 차례로 내놓고 갑자기 타계해버린 뒤에,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나오기까지는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야만 했다. 홈즈가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쏟아진 어마어마한 양의 추리소설을 생각해보면 이 40년의 공백은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다. 


   . 그래서 뒤팽과 홈즈 사이의 40년을 찾아가다보면 이런 저런 작가들과 만나게 된다. 일단은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죄와 벌'은 범인과 피해자와 탐정, 증거와 추론과 심리분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추리소설의 요소를 훌륭하게 갖춘 작품이다. 그리고 작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인해 미완성으로 끝난 덕에 오히려 지금까지도 그 진상을 추리할 수 있는 찰스 디킨스의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도 훌륭한 추리물이고.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추리라는 요소는 수많은 작품 중 한두 작품에만 등장하고, 그 안에서도 도구 중 하나로만 등장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추리소설 작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 그들 대신에 잃어버린 40년(?)의 작가로 이야기되는 것이 이 책의 작가인 윌리엄 윌키 콜린스다.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고딕 로맨스&호러라는 장르에 미스테리한 사건이 결합된 추리소설을 선보였는데,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는 포나 도일의 추리소설보다는 에밀리 브론테나 메리 셸리의 고딕소설의 느낌이 더 강하게 난다. 사건과 추리는 단순하고 통속적이지만, 인물들간의 관계나 이를 통해 형성되는 감정선이 꼼꼼하게 묘사되어 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집은 그런 그의 대표적인 추리소설인 '월장석'이나 '흰옷을 입은 여인' 이전에 나온 단편들인데, 그래서 그런지 아직 명확하게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다. 뭔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사건을 해결하기보다는 사건에 휘말려 긴장감과 재미를 전달한다. 때로는 '꿈속의 여인'처럼 뭔가 운명적인 연결을 다루는 비극적인 스릴러이기도 하고, '가브리엘의 결혼'이나 '얼어붙은 땅'처럼 감동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 '페루지노 포츠 씨의 인생길' 같은 코믹스러운 단편이기도 하다. 그나마 '미치광이 몽크턴'에서는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두고 꽤 세련된 추론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운명에 농락당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 그래서 이 책의 소개만을 보고 뒤팽과 홈즈 같은 정통추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김이 빠질 수도 있겠지만, 대신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매이지 않는다면 오 헨리의 단편을 읽듯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만약 추리소설적인 측면이 정 아쉽게 느껴진다면, 여기서 끝내지 말고 꼭 작가의 말년에 쓰여진 월장석을 읽어보길 권한다. 그러면 포나 도일과는 다른 지점에서 파생된 '드라마틱한' 추리소설이 여러 중간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을 테니까. :)




   내 모험의 좋은 결과 하나는 어떤 검열관이든 허가했을 만한 것이다. 나는 재미로 도박을 하는 병에서 완치됐다. 초록색 테이블보 위에 놓인 카드와 수북한 돈더미를 보면 언제나 밤의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날 압사시키기 위해 천천히 내려오는 침대 캐노피가 떠오르니까. 

                                                                                                                               - p. 180. 아주 기묘한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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