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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Mar 24. 2024

단절과 상실의 이야기 속에 오롯이 빛나는 '선한 서사'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 p. 380.




   . 이 소설은 단편 '반딧불이' (판본에 따라서는 '개똥벌레'로 나오기도 한다)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차용한 채로 그 뒤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쓰여졌는데, 그래서 반딧불이에 해당하는 부분과 그 뒷부분은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반딧불이에 해당하는 부분은 하루키 특유의 감성적인 문장으로 쓰여져 있는 반면에, 그 뒤에 이어지는 부분은 그동안의 하루키 소설에서 쉬이 볼 수 없었던 사실적인 문장으로 쓰여져 있다. 그간의 하루키의 소설들이 아무리 그 시절에 유행하던 팝 음악이나 영화 제목 같은 고유명사 폭격(^^;) 이 있더라도 그 핵심에는 현실과 허구를 구별짓는 투명하고 얇은 막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 소설에 이르러서는 그 마지막 한꺼풀마저도 찢어 헤쳐내고 나온 느낌이다. 반딧불이 부분은 이 소설의 2~4장에 해당되니까, 양 쪽을 모두 읽고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 


   . 이 소설에서 하루키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 그리고 섹스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나와 쥐 3부작'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그리고 여러 단편들에서 보여준 '굳이 회피하지는 않지만 딱히 감정을 싣지도 않던' 서술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인데, 미도리도 미도리지만 레이코와의 적나라한 마지막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다(그동안의 독자들 중에선 거의 뺨을 맞은 것 같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지 않을까^^;). 이를 통해 이 소설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현실에 발을 딱 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이런 리얼리티는 하루키의 이후 작품들에서도 계속 이어져간다. 설령 작품 속에 환상적인 배경이 마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의 인물들은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가을이 끝나고 찬바람이 거리를 휘몰아치자, 그녀는 가끔씩 내 팔에 몸을 기대었다. 더플 코트의 두꺼운 천을 통해, 나는 나오코의 숨결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팔에 자기의 팔을 감기도 하고, 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기도 하고, 정말 추울 때에는 내 팔에 매달려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그 이상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여느때나 다름없이 걸어갔다. 나도 그녀도 바닥이 고무로 된 구두를 신고 있어서 두 사람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도로에 떨어진 커다란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을 때에만 바삭거리는 마른 소리가 났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나오코가 불쌍해 보였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따스함인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데서,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눈은 전보다도 더 투명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투명함이었다. 가끔 그녀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쓸쓸한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 p. 75.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미도리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만나 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에게 그리스 비극에 대해 설명하고나서 오이를 나눠 먹는 장면은 하루키가 리얼리티로 전향하는 과정에서도 놓지 않은 한 줌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부분이다. 이 장면을 읽으면 책의 첫 부분이 떠오르는데, 대학 시절의 이야기에 나오는 나가사와 선배는 소설 내내 자신만만하게 자신은 물론이고 주인공 역시도 어느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는 인간이며,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 자체가 그런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갈수록 모두가 모두를 잃어가는 전개는 그런 나가사와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하지만 이 장면을 통해 하루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는 남이었고 자신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이 - 심지어 그와는 말을 통해 제대로 의사전달이 되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 언어와 설명을 넘어 깊이 교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서 시각장애인과 손을 겹치고 성당을 그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그에 비해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하루키의 '선한 서사'가 나가사와의 냉소적인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온통 단절과 상실로 가득한 이 소설에서 더없이 분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배가 고픈데요, 오이를 먹어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도리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세면실에서 오이 세 개를 씻어왔다. 그리고 접시에 간장을 조금 붓고, 김으로 오이를 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다. 

   "맛있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간단하고, 신선하고, 생명의 내음이 물씬 납니다. 좋은 오인데요. 키위보다는 훨씬 좋은 음식인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를 먹어치우고 두 개째에 손을 댔다. 아작아작하는 상쾌한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오이를 송두리째 두 개를 먹고 나서야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가스 풍로에 물을 끓이고 차를 넣어 마셨다. 

   "물이나 주스를 드시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오이"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러세요. 김을 말아 드릴까요?"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침대를 올려 세우고, 과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오이에다 김을 만 다음, 간장을 찍고, 이쑤시개를 꽂아서 그의 입에 대어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거의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씹은 후에 삼켰다. 

                                                                                                                                                          - p.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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