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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06. 2024

어떻게든 스텝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댄스댄스댄스 - 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사)  ●●●●●●●◐○○


"너와 함께 있으면, 이따금 그러한 감정이 되돌아오는 수가 있어.
그리고 옛날의 빗소리나 바람 냄새를 한 번 더 느낄 수가 있어."



   "넌 내가 여태껏 데이트한 여자아이 중에선 아마 제일 예쁜 여자아이일 거야." 하고 나는 내 시선 정면의 길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아니지, 아마가 아냐. 틀림없이 제일 예뻐. 내가 열다섯이라면, 확실히 너와 사랑을 했을 거야. 하지만 난 이제 서른넷이니, 그렇게 간단하게 사랑은 하지 않아. 이 이상 더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 스바루 편이 더 쉬워. 그런 정도로 말하면 될까?" 

   유키는 이번에는 평온한 시선으로 나를 잠시 동안 보고 있었다. 그리곤 "이상한 사람"하고 말했다. 유키에게 그런 소리를 듣자 나는 내가 정말로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악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키의 그런 소리를 들으니 꽤 사무치는 것이다. 

                                                                                                                                                  - 1권, p. 199.




   . 여섯번째 장편소설이자 네 번째 '나와 쥐' 시리즈인 이 책에서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부터 계속되던 사소설적인 경향을 벗어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동안 하루키는 매 작품마다 기존과 다른 요소를 하나씩 추가해왔는데, '1973년의 핀볼'에서는 3인칭과 두 이야기를 병렬해서 전개하는 구성을,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문장 위주의 글에서 스토리 위주의 이야기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환상과 현실이라는 전혀 동떨어진 두 이야기가 서로 오가다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을,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리얼리즘에 기반한 이야기를 선보였다. 


   . 그리고 이 작품에서 하루키는 그동안 선보였던 모든 요소들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와 쥐 3부작에서 보여준 '쥐'와 '양사나이' 같은 상징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보여준 환상, 노르웨이의 숲에서 보여준 사실적이고 견조한 문장이 합쳐져 있고, 그 눈은 더 이상 내면 뿐만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다. 물론 그동안 하루키가 세상에 대해 얘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1970년에 있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장면이 등장하고,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1972년의 아사마 산장 사건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어디까지나 흘러가는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혁명의 시대'가 끝장난 후에 찾아온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 대해 공들여 이야기한다.  




   당시엔 그렇게 생각지 않았지만, 1969년의 세계는 아직 단순했다. 기동대원에게 돌을 던진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은 자기 의사 표명을 다 할 수가 있었다. 그런대로 좋은 시절이었다. 궤변론적인 철학 밑에서 도대체 누가 경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자진해서 최루가스를 뒤집어 쓴단 말인가? 그것이 현재인 것이다. 구석구석에 그물이 쳐져 있다. 그물 바깥에는 또 다른 그물이 있다.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돌을 던지면 그것은 되돌아 자기에게로 온다. 정말 그런 것이다. 

                                                                                                                                                  - 1권, p. 110.





   . 혁명과 저항조차도 예쁘게 포장해서 그럴싸해 보이는 소비재로 만들어버리는 시대. 북해도에서 도쿄로 돌아와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잡지사 프리랜서 일을 시작한 '나'는 어떻게든 그 속에서 제대로 된 기사를 써보려고 하지만, 개개인은 어떻게 해도 이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나오는 광고와 기사들 속에서 자신이 하는 건 결국 '문화적 눈 치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한다. 재능있는 연기자인 그의 친구 고한다 역시 되풀이되는 뻔한 배역과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 그리고 '경비 처리'로 대표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늪에 빠져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렇게 이 글에 나온 이들은 새로운 것을 적당히 소모하다 관심이 사라지면 빛바랜 중고품으로 내던져버리는 사회에 매몰된 채 하루하루를 허우적거리며 살아간다. 




   "재미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 글쓰는 일 자체는 별로 고통스럽진 않아. 쓰고 있으면 긴장이 느슨해지지. 하지만 쓰고 있는 내용은 제로인거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예를 들면 어떤 데가?" 

   "예를 들면 하루에 열다섯 곳이나 레스토랑이며 요리점을 돌고, 내놓는 요리를 한 점씩 먹어보고, 나머지는 전부 남겨놓는 일. 그런 것이 어딘가 결정적으로 잘못됐다고 나는 생각해." 

   "하지만 전부를 다 먹을 순 없잖아요?" 

   "물론 그럴 순 없지. 그런 짓을 하면 사흘이면 죽어버려. 다들 나를 바보인 줄 알지. 그런 짓을 하고 죽어도 아무도 동정하지 않아." "그럼, 하는 수가 없지." 하고 나는 되풀이 말했다. "그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제설 작업 같은 거야. 하는 수 없으니까 하고 있는거야. 재미나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구." 

   "제설 작업" 하고 그녀는 말했다. 

   "문화적 제설작업" 하고 나는 말했다. 

                                                                                                                                                  - 1권, p. 101. 




   .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은 씁쓸하다. 겉으로는 새로운 여자친구와 맺어지고, 내면에서는 '눈 치우기' 같은 무의미한 글에서 벗어나 나만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다짐으로 끝나지만, 실제로는 그런 후에도 이 체제를 벗어나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다는 게 너무도 명백하기에. 결국 이야기는 그런 사회지만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스텝을 밟으면서 그 안에서 각자가 짜낼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메시지로 끝난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씁쓸하다.




   "그도 무엇이 사라질까봐 죽 신경을 쓰고 있었어. 하지만 뭘 그렇게 걱정해? 무엇이든 언젠가는 사라지는 거야. 우리는 모두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어. 우리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물은 우리가 이동함에 따라 모두 언젠가는 사라져버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라질 때가 오면 사라진다구. 그리고 사라질 때가 올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아. 이를테면 너는 성장해가지. 앞으로 2년이 지나면 그 멋진 원피스도 몸에 맞지 않게 돼. 토킹 헤즈도 낡아빠진 것처럼 느껴질지도 몰라. 그리고 나와 드라이브 따위를 하고 싶지도 않겠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해.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 2권, p. 256.




   . 하지만 비록 이 소설에서는 별다른 답을 내놓을 수 없었지만, 하루키는 이 소설을 시작으로 사회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악'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태엽감는 새'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2차대전에서 벌어진 학살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해변의 카프카'와 '1Q84'에서는 평범한 이들 주변에 감돌고 있는 절대적인 악에 대항해 맞선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하루키가 미시적인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이를 매듭지은 소설이자 좀 더 거시적인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첫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점 때문에 다른 소설들처럼 열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하루키의 글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작품인 것이다. 




   "내가 아저씨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이에 대해 약간 생각해보았다. "끼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네가 염려할 게 못 돼. 그리고 결국 나 역시 너와 함께 있는 게 좋으니까 함께 있는거야. 의무적으로 어울리고 있는 게 아냐. 왜 그럴까? 왜 나는 너하고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할까? 나이 차이도 이토록 많고, 공통된 화제도 별로 없는데 말야. 이는 아마 네가 내게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기 때문일거야. 내 속에 죽 묻혀져 있던 감정을 상기시키는 거야. 내가 열세 살이나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쯤 되었을 무렵에 품고 있던 감정이야. 만일 내가 열다섯 살이었다면, 너와 숙명적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을 거야. 이는 이전에 말했었지?" 

   "말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구." 하고 나는 말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이따금 그러한 감정이 되돌아오는 수가 있어. 그리고 옛날의 빗소리나 바람 냄새를 한 번 더 느낄 수가 있어. 바로 가까이에 느끼는 거야. 그러한 건 나쁘지 않아. 그게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는, 너도 머지않아 알 수 있을거야." 

                                                                                                                                                  - 2권, p.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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