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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pr 20. 2024

이유도 논리도 없는 비일상이 들이닥쳐 일상을 집어삼킨다

TV 피플 - 무라카미 하루키(삼문)  ●●●●●●○○○○


마치 인생 그 자체인 것처럼, 딱딱하고 매끈하고, 그리고 멀리에 있었다.



   문득 들여다본 자신의 손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무력감이다. 주술이다. 자신의 몸이, 자신이란 존재가 점차 희박해져 간다. 그리하여 나는 움직일 수 없어진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세 사람의 TV 피플이 내 방에다 텔레비전을 두고 나가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지켜볼 수밖에 없다.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두려워진다.

                                                                                                                                              - p. 26. TV 피플




   . 이때까지 읽은 하루키의 소설을 '현실'부터 '환상'까지 순서대로 죽 늘어세운다면, 현실의 끄트머리엔 '노르웨이의 숲'이 있을 것이고, 그 뒤에는 현실을 비틀어낸 정도에 따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패밀리 어페어' 같은 소설들이 차례로 자리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환상의 끄트머리에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왜곡된 비일상들이 한데 뒤엉킨 채 흘러나오고 있는 이 소설집인 'TV 피플'이 있을 것이다.


   . 물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아예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도 있었고, '뾰족구이'처럼 현실을 대놓고 풍자하거나, '도서관 기담'처럼 아예 제목부터가 기담인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 작품들은 시대와 장소가 우리의 현실이 아닐 뿐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과 벌어지는 일들은 나름의 확실한 이유와 정연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야미쿠로(暗黑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지하세계의 생물)가 아무리 기괴한 존재라 한들 박사와 손녀딸이 그들의 정체와 움직이는 원리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고 그 덕에 주인공은 그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도서관에 찾아온 먹잇감에게 책을 읽히고 지식이 꽉 들어찬 뇌수를 먹는다는 노인(도서관 기담)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하지만 TV 피플의 이야기들 속에는 아무런 인과가 없다. 그러니 납득할 수도 없다.  


   . 비일상만으로도 충분히 이질적인데, 이 작품에서 하루키가 풀어놓는 비일상들은 하나같이 비틀리고 뒤틀어져 있다. 그래서 누구도 왜 가노 크레타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잠'의 그녀에겐 왜 잠이 오질 않는 건지, TV 피플은 왜 나타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물론 하루키에게도 설명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그러다가 갑자기 이유도 논리도 없이 손쓸 수 없는 갑작스런 파국이 닥쳐오고, 비일상이 일상을 잡아먹는다. 등장인물들은 속수무책으로 멀거니 그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루키는 그런 그들을 냉정하게 관찰한다.


   . 그렇게 무료할 정도로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이 가차없이 막을 내릴 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관찰해가며 하루키의 영역은 이 단편집을 통해 한결 더 넓어진다. 그리고 이 넓혀진 영역에서 '태엽감는 새'와 '해변의 카프카', '1Q84' 같은 그의 후기작들이 하나하나 싹을 틔우게 된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졸음이라도 올까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잠이 아니다. 나는 잠의 테두리 같은 것을 손가락 끝으로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깨어 있다. 나는 잠시 존다. 그러나 얇은 벽으로 나누어진 옆방에서, 그 의식은 말똥말똥하게 깨어, 나를 지그시 보고 있다. 나의 육체는 어슬렁어슬렁 어두컴컴한 공중을 떠다니면서, 내 자신의 의식과 시선과 숨결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나는 잠자고 싶어하는 육체이며, 그와 동시에 각성하려 하는 의식이다.

                                                                                                                                                      - p. 154. 잠


이전 15화 그래서, 역시, 10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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