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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May 04. 2024

그래서, 역시, 10점. :)

먼 북소리 - 무라카미 하루키(중앙일보사)  ●●●●●●●●●●


각 거리에는 각기 다른 공기가 있고, 각기 다른 달리는 기분이란 게 있다.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내가 빼놓기 아깝게 생각하는 것은 '시계 비추기'이다. 이건 요컨대 시간이 남았을 경우에, 그저 움직이는 시계의 바늘을 마냥 비추는 것이다. 기술도 아무것도 필요없다. 길 때는 이 "시계 비추기"가 오 분 정도 계속된다. 초침이 다섯 번 시계판을 돈다. 분침이 삼십 도 이동한다. 나도 한가한 참이라 팔짱을 끼고 바늘을 지이이이그시 보고 있는다. 초침이 소리없이 때를 새긴다. 소리는 전혀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뭣하고 있는 거야, 하고 어이없어 했지만, 이게 의외로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이 시계 바늘이 비치면 신기하게도 안심이 된다. 가끔 비치지 않거나 하면 쓸쓸해지기조차 한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재행무상이란 정취까지 느껴진다. 일본의 텔레비전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일대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 p. 274. 1987년, 여름에서 가을





   . 1986년 가을부터 1989년 여름까지, 하루키는 아내와 함께 일본을 떠나 유럽에 있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소설이 완성되면 두어달 정도 일본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그러다 또 핀란드나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댄스댄스'와 'TV 피플'을 출간했고, 노르웨이의 숲으로 일약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뛰어올랐으며, 그에 힘입어 댄스댄스댄스 역시도 순조롭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책에서 노르웨이의 숲의 대성공의 그 시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웠고, 고독했던 시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하루키는 도망치듯 다시 일본을 떠나 발칸반도 취재를 거쳐 로마에 머물렀다. 그가 돌아오는데에는 1년 반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 글을 읽고 있자면 하루키가 저 시기에 외국에 있었던 것에 안도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서른 일곱부터 마흔에 이르는 시기에 하루키는 작가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자신의 인생에 뭔가 중대한 전환점이 있을 거라고 예견하고 있었고, 모든 시기가 그렇듯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을 벗어나, 그 시간 동안을 오롯이 자신에 집중하길 원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의 핑계도 대지 않고, 이 글에 쓴 것처럼 '시간을 자신의 손으로 쥐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루키는 이야기 내내 몇 번이고, 이 여행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소설에 집중할 수 있어서든, 자신을 응시할 수 있어서든,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스타가 되어버린 대소동을 피할 수 있어서든. 





   가령 일본에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은 좀 더 걸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역시 비슷하게 두 편의 소설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댄스댄스는 결과적으로 쓰여져야만 했기 때문에 쓰여진 소설이다. 하지만 만약 일본에서 쓰여졌더라면, 이 두 작품은 지금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색채를 띠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만큼 수직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 p. 18. 글을 시작하며





   .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야기 내내 엄숙한 투로 작가로서의 고뇌와 작품론에 대해 말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물론 그런 부분도 있긴 하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옛날부터 책을 구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몇 번이고 대출해가며 꾸준히 읽었던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즐거워서였다. :) 책에서 하루키는 엉터리 지도를 그리는 부동산 아주머니를 만나기도 하고, 이탈리아 공공기관의 한심한 일처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하며, 그리스의 산길을 오르던 버스에서 버스기사까지 합세한 술판에 끼기도 한다. 거기에 조깅을 하기 위해 할머니를 설득하고 개와 눈싸움을 벌이는 웃픈 경험까지. 거기에 미코노스 섬의 토박이 아저씨인 반겔리스와의 우정에 - 이 부분은 나중에 만화 '갤러리 페이크'에서 일부 차용되기도 한다 - 유럽 시골에서 접한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 등등, 뒤늦게서야 여행을 갈 수 있었던 내게 이 책은 여행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러고보면, 내 여행기에서도 이 책의 말투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이 여기저기 묻어나고 있는 것도 같고. :)   





   여기에서 또다시 아기야 가리니에 있는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버스가 또 대단히 멋진 물건이다. 운전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에 맞춰 신나게 흥얼거리며 구불구불한 단애 절벽 위를 핑핑 달린다. 참 골치 아프군, 괜찮을까, 하고 걱정을 하였더니 아니나다를까, 왼쪽으로 도는 커브길에서 바뀌 한쪽이 절벽을 헛디디고 만 것이다. 버스의 차체가 기우뚱하고 기울어졌다. 나는 이제 이것으로 끝장이구나, 하고 체념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어렷차차차 하는 식으로 바퀴가 제자리로 돌아와 무사히 목숨을 부지했다. 차장이 "어이 운전사 양반 이러면 어떻게 해." 하는 얼굴로 운전사를 보았다. 운전사도 그후 한 십분 동안은 노래를 중단하고 있었으니, 제법 위험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 p. 226. 봄의 그리스로


   공짜 티켓을 얻었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에르나니'는 아주 활력에 넘쳐 있어, 시실리에서 본 세 편의 오페라 중에서는 가장 즐길 수 있었다. 시골 연극 같은 투박함이 있는 베르디로, 정색한 구석이 별로 없이 "모두들 오늘밤은 신나게 즐기지 않으렵니까." 란 식의 민중적인 활력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런 미래 지향적이며 현세적인 활기는 필시 이탈리아 지방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케스트라도 배역도 밀라노 같은 곳에 비하며 얼마간 뒤질지 모르겠으나(그러나 이날 밤 에르나니 역은 하아시 케이코 씨였다), 그런 만큼 객석에 "내가 이 동네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의 흥을 좀 돋우어야지." 하는 친밀한 공기가 흘러, 상당히 재미있었다. 옆에 앉은 아줌마는 귤을 먹으면서, 가수와 하나가 되어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다. 

                                                                                                                             - p. 164. 시실리에서 로마로





   . 예전에 '양을 쫓는 모험'에 대해 리뷰를 하면서 내가 10점을 주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고 쓴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자신있게 추천해줄 수 있는 최고의 명작인 경우와 나 자신에게 최고의 명작인 경우. 나는 때로는 이 책을 빌리고 반납해가며, 그 이후로는 꾸준히 책장에 꼽아두고 몇십년 동안 읽어보면서 글투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나 꽤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이 책이 나 자신에게 최고인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전자는 어떨까. 비록 그동안 10점을 줬던 책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코로나로 여행이 이렇게 오랜 기간 막혀있었던 상태에서, 이렇게 두툼하고 즐거운 내용으로 꽉 찬 여행기라면 - 그리고 읽는 과정에서 내 삶의 위치가 어느 지점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라면, 누구에게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역시, 10점. :)





   여행지에서, 그 동네의 길을 달리는 일은 즐겁다. 시속 십 킬로미터 전후가 풍경을 보며 달리기에는 이상적인 속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차는 너무 빨라서 사소한 것을 놓치기 쉽고, 마냥 걷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각 거리에는 각기 다른 공기가 있고, 각기 다른 달리는 기분이란 게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한다. 돌아가는 길모퉁이의 모습, 서로 다른 울림의 발소리, 보도의 폭, 쓰레기를 버리는 시민들의 양식, 각기 저마다 다르다. 정말 흥미로울 정도로 다르다. 나는 그런 동네의 정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달리는 것이 좋다. 

                                                                                                                             - p. 173. 시실리에서 로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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