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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May 15. 2024

타성에 젖어있었던 건 바로 나였다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2010년) - 무종(배수아) 外




1) 무종 - 배수아


   그러한 일상적 말과 장면들은 오랜 시간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발휘되는 어떤 성분들로 충만하고, 그것은 이제 오빠와 내가 일흔을 전후한 나이이며, 우리가 곧 서로에게 보이지 않게 되리라는 것, 어쩌면 그 순간이 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차분한 예감과 닿아 있는 것도 사실일텐데, 젊고 다정한 한때의 사람들이 이미 수없이 우리의 눈앞을 지나쳐 갔으며, 그들 또한 우리에게 매번 고유하고도 비밀스러운 작별의 몸짓을 보냈을 테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면서, 더없이 소중한 이름을 부르듯이 그 편지들을 들여다보았고, 이제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 그것 또한 우리가 지나쳐 온 이 길처럼 아름다울 터이니, 나는 오래된 편지로 인해 다시금 불러일으켜진 그 정체 모를 그리움과 아픔이 바로 내가 생의 최후로 간직하게 될 행복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그런 지 얼마 후 오빠의 일흔 세 번째 생일이었는데, 나는 생일파티에 가서 오빠가 내게 썼던 편지 중의 한 통을 읽었더. 종이가 누렇게 변색한 1962년 오월 어느 날의 편지. 아마 오빠 자신은 그 편지의 내용을 까맣게 잊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리고 대단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단지 내가 새로 이사간 집에서 몸이 아팠고, 오빠는 다른 도시에서 내 건강을 걱정하는 편지였을 뿐인데, 그 안에는 어떤 절실함의 연계, 고백하지 않는 애정, 더 이상 함께 살지 않게 된 젊고 가난한 오누이가 서로를 생각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살아나고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토록 오랜 시간의 저편에서 다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현재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란 것 때문에, 나는 차마 편지를 끝까지 다 낭독할 수 없었고, 눈물을 닦아내는 오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지. 

                                                                                                                                                          - p. 109.



   . 허구와 현재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어투의 두 이야기가 다른 길을 걷다 한데 뒤엉키다 결국 다른 길을 향해 간다.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정작 한국소설에 대해선 너무 무심했구나 싶어 간만에 읽기 시작한 수상작품집인데, 그동안 정말 오랫동안 한국 단편소설을 읽지 않았구나 하는 실감을 배수아를 읽으며 받게 된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세상과 읽는 독자와 쓰는 자신을 향해 시퍼렇게 갈린 손톱을 박아대던 배수아의 글은 내가 한국소설을 읽지 않던 동안 분노와 증오를 넘어 수용과 아름다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고보니 배수아가 50대 중반이구나. 그 배수아가. 




2) 아침의 문 - 박민규


   진단서를 떼 오라고 미친년아. 사실을 알아야 할 단 한 명의 인간은 그렇게 소리쳤었다. 거짓말을 잘하는 인간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전까지 그녀가 생각했던 인간의 범주라는 게 있었다. 이제 그녀는 변했다. 인간의 범주가 얼마나 넓은 것인가를, 머리채를 잡히고 폭행을 당하던 바로 그 순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주민등록증을 가진 괴물, 학생증이며 졸업증명서며 명함을 가진 괴물들이 가득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만들어 낸 단어가 인간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었다. 

                                                                                                                                                            - p. 20.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박민규는 정말 한결같이 머리가 잘 돌아가는 똑똑한 작가다. 지금 뭐가 팔리고 있는지, 뭐가 잘 팔릴지를 정확히 캐치하면서도 읽는 이에겐 아무거나 써낸 척 들이미는 그 솜씨라니. 비참한 죽음과 구차하게 살아남은 이와 추레한 탄생이라는 조합부터가 이미 이상문학상에서는 당연히 대상일수밖에 없다. 그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 적도 있었지만, 정말 오랫만에 읽었더니 그게 내 덜 된 몽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재미있으면 된 거잖아. 그거면 됐지. :)




3) 매일매일 초승달 - 윤성희


   셋째는 구멍난 팬티를 입을 때마다 평생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셋째는 아무도 사랑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도 믿지 않았고 미래를 믿지 않게 되면서 겁이 없는 아이가 되었다. 훗날, 세 자매 소매치기단을 결성했을 때 언니들은 셋째의 대범함에 놀랐다. 언니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셋째는 개미만 보아도 울던 아홉살짜리 소녀였다. 언니들은 셋째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이 남기고 간 낡은 속옷 때문이었다는 것을. 

                                                                                                                                                          - p. 137.



   . 소박하게 즐거웠다. 한국 현대소설이, 순문학이 재미없다고 생각하던 동안 작가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 이야기였다. 한때는 한국 작가들은 너무 타성에 빠져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정작 타성에 빠져있던 건 읽는 나였다. 




   .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 전성태

   . 세계의 식탁, 세계의 담배 - 김중혁 

   . 통조림 공장 - 편혜영 

   . 투명인간 - 손홍규 

   .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 - 김애란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채근했다. 어머니도 아들 걱정에서 많이 놓여나 있었다. 이야기가 바닥이 나서 더 해줄 게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예전에 들은 이야기들을 들먹이며 그것을 다시 해달라고 졸랐다. "얘기를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 어머니는 졸음에 겨워 그렇게 말하고는 하였다. 

                                                                                                             - p. 132.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전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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