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제국 : 중국 - 발레리 한센(까치글방) ●●●●●●○○○○
분열은 사람들에게 혁신을 강요한다.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관찰자들은 모두 제국이 통합되지 않았던 것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제국을 통일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바랐다. 그들은 분열과 전쟁, 잇따른 혼란에서 얼마나 많은 활력이 비롯되었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 p. 487.
. 쇄국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중국이지만, 따져보면 중국이 문을 닫아걸었던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다. 영락제 시기 정화의 원정 이후 마테오 리치까지 150년, 그리고 강희-옹정제 시기의 선교사 추방으로부터 아편전쟁까지 100여년 정도를 제외하면 중국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대항해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멀고 가깝고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만주부터 중동과 동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형성했던 세계제국이었던 원나라 시기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위진남북조나 당나라 시기부터 적극적으로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흡수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는 한자에 차용되었으며,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천년 전에 이미 경교라 불리는 네스토리우스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절도 있었다. 발레리 한센은 그런 사례들을 적극 소개하며 일원화되고 폐쇄적인 중국 역사 대신, 좀 더 다양하고 개방적인 중국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 생각해보면 진나라의 중국 통일이 너무 빨라서 통일된 중국에 익숙해진 것일 뿐 중국은 그 시작부터 다양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고조선과 경계를 맞대고 있던 북쪽 끝의 연나라와 이름부터가 월(베트남)이었던 남쪽 끝의 월나라는 민족이 다른 것은 물론 아예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고 하며,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 역시 서북쪽 끝에 있었기에 중원과는 풍속이 달라 야만스럽다고 업신여김을 당했을 정도였다. 민족 뿐 아니라 사상에 있어서도 그렇다. 얼마나 많았으면 '백가(百家)'라 불리는 사상가들은 온 중국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사상을 퍼뜨렸다. 그렇기에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무엇보다도 먼저 도량형과 문자, 화폐를 통일하고 도로를 건설했으며 사상의 일원화를 위해 분서갱유를 저질렀고, 이 때부터 중국 역사는 다양화와 일원화가 치열하게 격돌하는 장이 된다.
전통시대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지만, 분열은 사람들에게 혁신을 강요한다. 이 시기(위진남북조의 혼란기) 동안 도교의 연금술사들은 처방전과 약초를 실험하였다. 또한 대담한 불교 구법승들과 상인들은 비단길과 바닷길을 개척하여, 이를 가로질러 빈번히 중앙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로 여행하였다. 안지추가 지적했듯이 화북과 강남은 서로 다른 문화적 독자성을 발전시켰고, 이 독자성은 589년에 수 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 p. 230.
. 재미있는 건 분열과 혼란, 점령의 시기로 알려졌던 때가 오히려 변화와 발전이 촉진되던 때였다는 것이다. 북방민족의 점령과 융화가 반복되던 남북조 시대, 요-금과 송나라가 격돌하던 시기, 그리고 원나라 때에는 다양성과 개방성의 흐름이 가속화되었다. 이 시기 중국의 역사는 북방민족이 원주민을 점령하고 둘이 융화하는 과정의 반복이었기에 자연히 문화가 빠르게 변화되었고, 개방과 변화를 거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북방 민족이 세운 북조가 남조를 멸망시켰던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는 이런 추세가 절정에 이르러 이 때 중국은 거리낌없이 나라의 문을 연다. 황실부터 외래종교인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이슬람교와 경교 역시도 전성기를 맞았다.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외국인과 혼인하고 그들의 관습을 받아들였다. 당태종 이세민의 아들은 가문의 흐르는 돌궐족의 피(당나라 황실은 한족과 돌궐족의 혼혈이었다고 한다)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돌궐어로 말하고 돌궐 의상을 입겠다고 고집하다가 눈밖에 나기도 했고, 이런 당나라의 개방성은 중국 유일의 여성황제 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요나라 역시도 거란족 시절의 유목문화를 상당 부분 수용했기에 태조 야율아보기의 부인이었던 순흠황후는 태조의 생전에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후에는 군사를 이끌고 남정해 연운 16주를 손에 넣을 정도였다.
. 이와 반대로 원주민이 북방민족을 몰아낸 거의 유일한 사례인 명나라 시기에 중국이 급격히 폐쇄적으로 바뀌었던 것도 생각해볼만한 사례다. 명나라는 오랜 역사를 거쳐 수용된 불교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외래종교를 거부했다. 이슬람교는 간신히 외곽의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였고 티벳 불교는 침략자의 종교로 배척되었다. 기독교와 경교는 긴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아예 사멸되고 말았다. 국가 정책 자체도 급격하게 외부에서 눈을 돌려 내부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명나라 초기에 이뤄졌던 정화의 원정은 오이라트 원정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런 폐쇄성은 일반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가정 내에서 여성에게 가정도덕을 강조하고 효부열녀를 권장하며 전족이 일상화 되는 등 명나라 시대를 거치며 가정 내 신분이 고착된다. 책에 나오는 원나라 말기 조맹부와 관도승 부부의 일화(조맹부가 첩을 얻겠다고 했을 때 관도승이 시를 써 이를 막았다는)와 비교해보면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난다. 이런 폐쇄성은 명나라 말기에 마테오 리치가 들어올 때까지 150년 동안 유지되고, 중국이 개방성을 유지하던 동안에는 한참 뒤쳐져 있던 유럽이 중국을 따라 잡을 수 있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