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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May 26. 2024

'이야기' 이전에, '르네상스'가 있었다

르네상스의 여인들 - 시오노 나나미(한길사)  ●●●●●●●◐○○


"멍청한 놈들아, 이것만 있으면 아이쯤은 앞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단 말이다."




   이사벨라 데스테는 이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식의 완전한 조화 속에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는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 즉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 사이에 '갈등'이라는 혼탁하고 달콤한 관계는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과 육체를 나누어 생각하고 싶어하는, 인문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지 않은 북방의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였고, 사보나롤라가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거나 당시 교황들이 타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정신과 육체가 인간 속에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체는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사벨라 데스테는 30대 후반부터 40대에 걸쳐 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을 더한층 대담하게 구현해 나갔다. 

                                                                                                                                  - p. 63. 이사벨라 데스테




   . 우리나라에서는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로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 여사지만, 실제로 여사의 시작은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를 소재로 한 소설적인 논픽션들이었다. 그 직전까지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도덕과 종교를 각기 한꺼풀씩 벗겨내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아름답고 매혹적인 예술을 탄생시키던 르네상스 시대. 같은 시대의 예술에 비해 지명도가 확연히 떨어지기는 하지만,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펼쳐낸 정치와 전쟁과 음모가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를 다룬 게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 그 첫 번째 책인 '르네상스의 여인들'에서 여사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아간 네 명의 여인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다. 우선 기존의 여성형을 벗어나지 못한 채 국가와 가문의 정략에 이용당한 카테리나 코르나로와 루크레치아 보르자. 그 둘을 다루는 장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키프로스의 여왕이었던 카테리나 코르나로의 이야기에서는 그녀를 꼭두각시로 세워둔 채 그 뒤에서 냉정하게 지중해를 움직여가던 베네치아의 정략이 주인공이 된다. 루크레치아 보르자에선, 아직 젊었던 - 이 책을 썼을 때 여사는 갓 서른 살이 넘은 나이였다 - 여사를 카이사르만큼이나 열광시켰던 체사레 보르자가 등장해 그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멋진 위선이다. 게다가 철저한 위선이다. 카테리나 코르나로의 일생은 이 베네치아의 위선에 휘둘리고 장식되었다. 위선은 그 위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저지르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고약한 악취로 사람들을 해친다. 그러나 자신의 위선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위선은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아름다움마저 지닌다.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사람들의 이 강인한 정신은 지금은 단지 지중해 하늘에 울려퍼지는 너털웃음, 자유로운 정신과 날카로운 감수성을 가진 인간만이 들을 수 있는 드높은 웃음소리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 p. 353. 카테리나 코르나로



   . 이 책에서 체사레 보르자는 시대가 맞지 않는 카테리나 코르나로 편을 제외한 나머지 세 편에 모조리 등장해 휘황찬란한 매력을 뿜어내는데, 그 덕에 일본에서는 책이 나왔던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꾸준히 체사레 보르자를 주요 등장인물로 하는 만화가 나올 정도고, 특히 소료 후유미가 그린 '체사레'는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게 너무나도 아쉬운 걸작 중의 걸작이기도 하다. 심지어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남편이자 이사벨라 데스테의 동생인 알폰소 데스테까지도 꽤나 인기를 얻어서 여러 2차 창작물들에서 멋있고 자상하면서도 지적인 훈남으로 나온다고 하니 그 파급력이란. :) 


   . 결국 이 책에 나오는 네 명의 인물들 중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여성은 포를리와 이몰라의 영주로 체사레 보르자에게 용감하게 맞서면서 빛을 발하다 몰락한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만토바 백작부인이자 섭정으로 평생을 (여사의 표현에 따르면) '완성된 르네상스인'으로 살았던 이사벨라 데스테 둘이다. 책은 이 둘을 통해 르네상스를 헤쳐나가는 인물들의 전형인 '사자와 여우'를 보여주는데, 사자의 심장을 가졌던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비록 결국 그 때문에 몰락하기는 했지만 정점에서만큼은 체사레 보르자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빛났고, 여우의 두뇌를 가졌던 이사벨라 데스테는 비록 작은 나라의 백작부인에 불과했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며 체사레 보르자와 로마와 피렌체가 차례차례 무너지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르네상스가 끝날때까지 만토바를 지켜낸다. 


   . 이 책을 시작으로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와 외교, 전쟁을 특유의 화려하고 극적인 필치로 써내려가면서 일약 스타작가가 된다. 체사레 보르자, 그의 아버지, 적, 친구였던 세 교황의 이야기,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이탈리아의 희망이자 빛으로 동경하던 피렌체의 한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사자의 심장과 여우의 두뇌'를 모두 갖춘 이들의 이야기가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여사의 시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르네상스로부터 무려 1500년 전의 인물이지만 누구보다도 르네상스적이었던 - 아니, 르네상스의 말뜻을 생각해보면 르네상스가 그 남자를 닮은 것이었을까 - 한 남자에 이른다. 그 지점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여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튿날 음모자들은 카테리나의 아이들 가운데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성채 앞으로 끌고 갔다. 아이를 이용하여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 것이다. 칼로 위협당한 아이들은 울면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카테리나가 성벽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맨발에 머리도 묶지 않고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오르시는 성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여기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야말로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모든 역사가가 후세에 전한 그 유명한 말이다. 카테리나는 유유히 치맛자락을 홱 걷어올리고는 이렇게 외쳤다. "멍청한 놈들아, 이것만 있으면 아이쯤은 앞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단 말이다." 

                                                                                                                             - p. 217. 카테리나 스포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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