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시울 Apr 27. 2024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았기에 파멸로 이어진 쿠데타

쇼와 유신 - 한상일(까치글방)  ●●●●●●●○○○


실패한 쿠데타는 성공했다.



   '궐기'는 '반란'으로 끝났다. 26일 새벽 청년장교들이 궐기했을 때 도쿄를 뒤덮었던 눈이 전부 녹은 것처럼 그들의 쿠데타도 역사의 한 사건으로 흘러들어갔다. 일본을 진동시켰던 4일간의 쿠데타는 외관상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쿠데타 종식 이후 청년장교들이 지향했던 군 중심의 총동원체제를 지향하는 국가개조가 실질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쿠데타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쇼와 유신의 기점이 되었다. 

                                                                                                       - p. 305. 쇼와 유신의 종막 : 2-26 쿠데타




   . 1936년 2월. 도쿄에서 쿠데타가 있었다. 함박눈을 맞으며 무기를 든 청년 장교들은 수상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을 습격해 사살하고 경시청과 육군본부 등 주요 부서들을 장악하는 한편,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를 손에 넣고 정부관청으로 통하는 길을 봉쇄했다. "천황을 둘러싸고 있는 간신과 군의 도적들을 제거"하고 '국체'(천황절대주의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를 옹호하겠다던 그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 그러나 그들의 기세는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꺾였다.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히로히토는 청년 장교들의 주장이 가당치도 않다며 그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가차없이 진압할 것을 육군에 강경하게 지시했다. 내심 쿠데타의 성공을 기대하면서 이를 기회로 세력확장을 노리던 군부가 사흘만에 돌아설 정도로 단호한 입장 표명이었다. 히로히토의 인생에서 이때만큼 단호하고 강경했던 적은 없었다. 지지기반을 잃은 쿠데타 세력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사태가 마무리 된 것 같았던 1년 후, 일본은 군부의 강경론자들에 휘말려 전면적으로 만주를 침공했다. 그리고 8년 후, 원자폭탄 두 발을 맞고, 소련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만주를 내주고 전면 항복한다.




   천황은 "2-30분마다 사태의 변화를 문의하면서 진압을 독촉"했다. 행동부대에 동정적 입장을 보인 군사참의관들과 육군의 일부 상층부, 그리고 가와시마 대신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천황은 혼조 시종무관장에게, "짐 스스로 근위사단을 이끌고 반도를 진압하겠다"고 할 정도로 태도를 명확히 했다. 천황이 청년장교들을 "반도"로, 그들의 "궐기"를 "반란"으로 규정한 이상 청년장교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그들이 외친 존황의 의지는 천황에 의해서 거부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반란군으로 전락했다.

                                                                                                        - p. 294. 쇼와 유신의 종막 : 2-26 쿠데타




   . 한상일은 이 책을 통해 일본의 방향을 파멸로 이끈 사건을 서술해나간다. 단순히 연대표를 읊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앞서서 사건의 뿌리가 되는 배경과 사상을 파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한다. 300쪽이 좀 넘는 이 책에서 국가-초국가-군국주의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분량만 80쪽이 넘고, 책의 절반 이상이 지나가고 나서야 1930년대의 이야기들이 서술되며, 270쪽에 이르러서야 2.26 사태에 접어들 정도니 그 깊이가 짐작이 갈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을 집어삼키고 1차대전까지만 해도 전략적인 판단을 통해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왜 누가 봐도 역부족인 전쟁의 늪에 끝없이 빠져가게 되었는지, 그 시대 아시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칭해지는 민주주의 발전을 이룩했던 일본이 왜 급진적인 군국주의와 천황절대주의의 광기로 치닫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꼼꼼하게 쓰여져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음지로 전락하게 된 농촌의 불만과 농촌경제의 몰락은 케리 스미스의 연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농본주의에 바탕을 둔 국수주의 이데올로기와 쉽게 융합될 수 있었고, 반동적 과격주의의 온상을 마련해주었다. 하급병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촌 출신 장병들은 고향의 궁핍으로 국가의 위기를 통감하면서 폭력혁명에 적극 동조했다. 

                                                                                                                              - p. 40. 다이쇼 시대의 풍경




   . 1차대전으로 인한 찬란한 호황의 이면에서 일본사회의 빈부격차는 점점 벌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격차는 호황이 끝나고 경제공황이 덮쳐오자 심각한 불만과 사회문제로 표출되었고 사회 각 분야에서 불만과 비판이 폭주하면서 여러 논객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재벌에 편중된 비정상적인 경제구조를 비판하기도 했고, 정경유착 등 부패를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무방비하게 받아들인 외국의 제도와 문화의 부작용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천황의 존엄성을 바로 세우고 부패한 사회를 일거에 정화시키는 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변했다(물론 그들 중에는 기타 잇키 같은 예외도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기타 잇키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이 통째로 필요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다층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들의 주장은 군대 내의 혁명론자들을 통해 빠르게 군 내부에 침투되었고, 대부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농촌에서 올라온 군인들은 이런 주장에 쉽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30년대부터 사상화된 군인들에 의해 각종 테러와 쿠데타 음모가 빈발하지만, 이를 막고 다독였어야 할 군부는 오히려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그리고 군대에 대항할 물리력을 갖지 못했던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무기력하게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악순환은 2.26 쿠데타로 이어졌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히로히토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그 저변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에 비해 쿠데타를 거치며 군부의 강경한 주장에 저항하던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살해당했고, 남은 이들은 자신들도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제 그 누구도 군부가 정권을 잡고 파멸적인 전쟁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정문으로 들어선 미카미 일행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시작하려는 수상을 발견했다. 식당으로 들어서면서 한 명이 느닷없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발이었다. 수상은 천천히 손을 흔들면서 "기다리게. 총은 언제든지 쏠 수 있으니 먼저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하세" 하면서 응접실로 향했다. 그들이 자리잡고 앉았을 때 뒷문으로 들어온 해군 중위 야마기시 히로시가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다는 뜻의 "문답무용, 발사!" 하는 호령과 함께 미카미 다쿠와 구로이와 이사무의 권총이 이누카기의 머리와 복부를 향하여 불을 뿜었다. 77세의 늙은 수상은 다다미 바닥 위를 붉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화약 냄새가 응접실에 가득했고, "화약연기와 함께 정당정치가 사라졌다." 

                                                                                                       - p. 223. 쇼와 유신의 횃불 : 5-15 쿠데타





   . 다만 한 가지, 한국 학자가 쓴 책임에도 아쉽게 간과된 것이 있다. 쇼와 유신의 근본적 요인이었던 일본 농촌의 몰락은 다름 아닌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벌인 산미증산계획으로 인한 것이었다. 1차대전 후의 경제호황기를 거치며 이촌향도가 본격화되면서 급격하게 쌀이 부족해지자 일본이 선택한 것은 농촌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을 쌀 생산기지로 삼는 것이었다. 산미증산계획이 어느 정도 성과를 달성하며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급격하게 흘러들어가게 되자 일본의 농가는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농촌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농가의 사내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곳은 군대 뿐이었고, 집안과 농촌사회의 붕괴를 -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도시와 상류층의 번영을 바라본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불평등한 사회를 뒤엎어야 한다는 쿠데타 사상에 강하게 경도된다. 일제의 조선강점은 조선은 물론, 일본에게 있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훗날 '2-26 사건'으로 알려진 군부의 최종 쿠데타는 1915년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안 원리대강'을 기점으로 시작된 쇼와 유신과 국가개조운동의 종막이었다. 쇼와 유신의 불씨를 지폈던 기타를 위시해서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장교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실패로 인한 쿠데타는 역설적으로 그동안 쇼와 유신론자들이 추구한 최종 목표인 군부 중심의 국가총동원체제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한 쿠데타는 성공했다. 

                                                                                                       - p. 271. 쇼와 유신의 종막 : 2-26 쿠데타


매거진의 이전글 묵직. 우직. 정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