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시울 Mar 29. 2024

왜 1차대전은 그토록 길고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는가

8월의 포성 - 바바라 터크먼(평민사)  ●●●●●●●●◐○


"그들이 우리에게 측면을 드러냈다! 그들이 우리에게 측면을 드러냈다!"



   유럽은 잭스트로처럼 섬세하게 포개진 칼 더미였는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 것을 건드리지 않고는 자기 칼을 뺄 수 없었다. 독오동맹에 의해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오스트리아를 지원해야만 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동맹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독일과 "방어적 전쟁"을 할 경우 나머지는 반드시 독일을 공격해야만 했다. 국가 간의 이러한 조약들 때문에 독일은 어떤 경우에도 러시아와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양면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 p. 75. 최우측 병사의 소매가 해협을 스치도록 하라




   . '몽유병자들'에 이어 1차대전 초기에 대한 책을 한 권 더 읽는다. 몽유병자들이 1903년의 세르비아 국왕 암살사건부터 시작해 1914년의 1차세계대전 개전시점에서 끝을 맺는데 비해, 이 책은 거기서 한 달을 더 할애해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전격전, 동부전선에서 일어난 탄넨베르크 전투를 거쳐 파리 코앞에서 벌어진 마른 전투 직전에서 극적인 종지부를 찍는다. 이렇듯 1차대전 발발 직후의 전개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기 때문에 훨씬 읽는 재미가 있다. 


   . 더구나 저자인 바바라 터크먼 여사는 역사가가 아닌 역사저술가이기 때문에 - 시오노 나나미 여사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책이 그렇듯 이 책은 엄청나게 재미있다(!!!!) 정통 역사가들에 대항할 수 있는 역사저술가들의 유일한 무기가 글빨인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퓰리처 상까지 받았으니만큼 재미에 있어선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앞전에 소개했던 몽유병자들을 읽었다면 - 그리고 그 두껍고 '묵묵한' 책을 읽고도 여전히 1차대전에 대해 관심이 남아있다면(^^;) 이 책은 그냥 전적으로 믿고 집어들면 된다. 다만 1차대전의 이유를 다각적이고 세세하게 고찰한 몽유병자들에 비해 이 책은 종래의 독일 책임론을 그대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전문가의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부분이 불만족스럽다면 아예 1차대전 이전 발발 부분은 과감하게 뛰어넘고 개전 이후부터 읽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원래의 670쪽에서 확 줄어서 430쪽 정도만(?) 읽으면 되니까. :)




   돌격전술을 규정한 프랑스군 야전 교범에 의하면, 20초 동안의 돌격으로 보병은 적 보병이 총을 들어 어깨에 대고, 조준, 발사하기 전에 50미터를 전진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후일 프랑스군 병사가 비통하게 술회했듯이 "실전연습을 통해 그토록 힘들게 훈련한 이 돌격요령"은 전쟁터에서 소름끼치도록 어리석은 짓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이 사격에 필요한 시간은 20초가 아니라 8초였다. 

                                                                                                   - p. 378. 패전 : 로렌, 아르덴느, 샤를루와, 몽




   .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 규모나 기간, 무엇보다 비극적인 요소에 있어 기존의 전쟁과는 궤를 달리했던 게 '1차세계대전'이지만, 사실 전쟁 발발 시점만 해도 누구도 그렇게 길고 많은 사람들이 살상당하는 비극적인 전쟁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에 있던 강대국들간의 마지막 전쟁인 보오전쟁(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과 보불전쟁(프러시아-프랑스 전쟁)이 모두 단기전이었기에 이 전쟁 역시도 단기전일거라고 예상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더구나 앞선 전쟁들에서 빠른 승부를 가능하게 했던 교통의 발달, 화력의 집중, 전술의 변화 같은 모든 요소가 더 강화되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 거듭되어진 양측의 실책은 1차대전을 길고 비참한 장기전으로 이끌어갔다. 


   . 프랑스는 달라진 전쟁 양상과 화력의 증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기관총 앞에 군인들을 맨몸으로 돌격시키는 미친 짓을 벌였고, 이 뿐만 아니라 전쟁 초기에 철광 지역을 독일에게 빼앗기면서 상대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지대를 고스란히 내주는 대실책을 저질렀다. 영국과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를 쇠약하고 무력해진 제국으로 단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다 오스만 투르크를 적으로 돌리는 바람에 전쟁 내내 러시아는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할 수 없게 되었다.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모두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 물론 본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형편없이 약했다. 그나마 좀 나았다는 독일 역시도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을 계획해두고도 외교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못해 러시아와는 양면전쟁을 벌이고, 벨기에에서도 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과정에서 독일이 믿고 있었던 슐리펜 계획은 몇 번이고 수정에 수정을 거치면서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이 모든 실책이 겹쳐지면서 어쩌면 단기간에 끝났을 수도 있었던 전쟁이 길고 비참한 장기전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중해로 나가는 출구가 막혀버린 러시아는 일 년의 반이 얼음으로 덮인 아르항겔스크와 전선으로부터 8,000마일이나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흑해가 막히자 수출은 98퍼센트, 수입은 95퍼센트가 감소했다. 궤벤의 항해에 뒤이어 모든 주요 동맹국으로부터 러시아가 차단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무의미하게 피를 흘린 갈리폴리의 비극이 있었고, 메소포타미아, 수에즈,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전투에 연합군 전력이 전용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붕괴 및 그로 인한 중동의 역사적 사건들이 뒤따라 일어났다. 

                                                                                                                  - p. 276. 달아나버린 적함.... 궤벤.




   . 바바라 터크먼 여사는 이런 실책들이 겹쳐지며 결국 장기전으로 향해가는 개전 초 한 달 반의 이야기를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꼼꼼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전쟁을 이끄는 군 지휘부와 정치인들이 계속 변하는 전황과 제한된 정보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선택이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갔는지, 그리고 그 순간순간 갈등과 고민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성공 혹은 실패에 이르는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 소개에는 소련과 미국의 쿠바 핵미사일 설치 위기 때에 존 F. 케네디가 이 책을 참고했다는 광고 문구가 실려 있는데, 그 진위여부를 떠나 고민과 유혹 속에서 각자의 이유와 결심을 통해 결단을 내리는 모습은 한 번쯤 눈여겨 봐둘만했다. 




   갈리에니의 제2국(정보) 참모실에서는 장교들 사이에 소리없는 흥분이 일고 있었다. 전방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참모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지로동 대령이 긴 의자에 누운 채 벽에 걸린 지도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지도 위에서는 색칠된 핀들이 독일군의 진격 방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영국군 비행사의 또 다른 공중정찰 보고서가 막 도착했을 때 갈리에니의 참모장인 클레제리 장군이 방에 들어왔다. 다시 한 번 몇 개의 핀들이 움직이면서 클룩의 선회를 나타내는 궤적이 지도상에 분명하게 표시되자 클레제리와 지로동은 동시에 소리쳤다. 


   "그들이 우리에게 측면을 드러냈다! 그들이 우리에게 측면을 드러냈다!" 

                                                                                                                                  - p. 639. 폰 클룩의 선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