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시울 Mar 23. 2024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지금 그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레이트 게임 - 피터 홉커크(사계절)  ●●●●●●●○○○


극동에서는 함대에 조선의 포트해밀턴(거문도)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러시아가 판데를 점령했다는 소식은 일주일 뒤에 런던에 전해졌다. 사람들은 격분하면서도 당황했다. 심지어 정부도 "가장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인정했다. 런던의 외국 외교관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강국 사이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기예르스만이 아니라 차르에게도 놀림을 당한 꼴이 된 글래드스턴은 아프가니스탄인 학살을 도발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공격이라고 비난하고, 러시아가 의문의 여지 없이 아프가니스탄의 영토를 점령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하원에 나가 상황이 절망적이지는 않지만 심각하다고 말했다. 증권거래소는 공황에 가까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글래드스턴은 양당의 흥분한 국회의원들로부터 1100만 파운드의 전시 예산을 얻어낼 수 있었다. 외무부는 선전포고문을 준비했다. 경계 태세에 들어간 해군은 모든 러시아 전함의 이동을 감시했다. 극동에서는 함대에 조선의 포트해밀턴(거문도)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 해군 요새와 북태평양의 다른 목표물에 대한 작전을 펼치기 위한 기지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 p. 543. 눈앞에 다가온 전쟁




   . 역사는 참 재미있다. 하나하나씩 읽을 때는 별개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곳저곳, 이 시대 저 시대의 역사가 쌓여가다보면 그 내용들끼리 연결고리가 생기고, 고리를 잇는 선들이 늘어나면 선들은 면을 이룬다. 이 책에서 다루는 19세기 중앙아시아의 -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과 지방 토후들의 -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와 이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블로그에서 읽은 체첸 독립사와 이어진다. 간혹 뜬금없이 모리 카오루의 '신부 이야기'와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면이 생겨나면 이번에는 반대로 빠진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부분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가는 게 역사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 책의 이야기들은 그런 '빠진 부분들' 중 하나다.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알렉산드르 황제와 나폴레옹의 전쟁, 영국의 인도 점령과 청나라의 융성과 몰락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런 잘 알려진 공간들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중앙아시아는 사막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역사적으로는 몽골제국의 일부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가 갑작스럽게 9.11과 아프간 전쟁을 통해 우리에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중간에 500년 넘는 기간이 우리에게는 공백으로 다가오다보니 최근의 이슈들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는, 지금은 '-스탄'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땅'들이 제국주의 세계사에 편입되는 과정은 한 번 읽어둘만하다.


   . 이야기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한 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한숨돌린 유럽 국가들은 다시 한 번 유럽 밖으로 팽창해나가고, 그 중에서도 이미 한 세기 전 시베리아를 넘고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까지 다다랐던 러시아는 이번에는 남쪽으로 내려와 인도와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을 열기  시작한다. 자연히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인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이에 대응하여 주변의 세력들을 하나하나씩 편입해 인도와 러시아 사이에 최대한의 완충지대를 만들고자 하고. 그렇게 한 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두 강대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지도를 만들고 길을 내면서 양국의 경계를 좁혀들어간다. 그 와중에 여러 모험가들과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 때로는 정말 목숨을 희생해가면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다.


   . 또한 중앙아시아의 이야기는 단순히 열강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중앙아시아에 있던 여러 칸 국들 역시도 두 강대국을 맞아 때로는 외교를 통해, 때로는 군사적인 공세를 통해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 러시아는 체르시아-다게스탄에서 산지 민족에게 완패를 당했고, 중앙아시아의 주요 길목인 히바에서 두 번이나 진격에 실패한다. 영국 역시도 카불에서 5천 병력과 1만 민간인이 몰살당하는 대참사를 경험하는 등 세계 각지에서 기세좋게 뻗어나가던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앙아시아에서만큼은 고전을 면치 못한 채로 100여년의 세월을 소모하고 나서야 간신히 카스피해에서 티벳에 이르는 그레이트 게임을 마무리짓는다.


   . 하지만 오늘 날 아프가니스탄을 봐도 알 수 있듯, 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기간은 그들이 허비한 100년보다도 짧았다. 인도를 지키기 위해 중앙아시아에 손을 뻗었던 영국은 그 과실을 맛보지도 못한 채 세계대전에 모든 힘을 쏟아붓고는 중앙아시아는 물론 그들이 원래 지키려고 했던 인도에서조차 물러나야 했고, 러시아 역시 아프가니스탄과의 진흙탕 싸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철군해야 했다. 뒤늦게 이 지역에 뛰어든 미국 역시도 유령을 상대하는 듯한 끝없는 테러와의 전쟁에 수십년을 허비한 채 물러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다시 한 번 탈레반과 저항세력 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백여년 전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어졌던 열강들의 진출과 지역민들의 항쟁은, 나라와 시간만 바뀐 채로 오늘날의 우리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재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를 읽는다는 말이 변해가는 시대에선 너무 고루한 격언처럼 느껴질 지 몰라도, 중앙아시아에만큼은 더없이 유효한 명제인 것이다.




   그 집에 들어서자 이상한 개 두 마리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유럽 산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리는 테리어였고 또 한 마리는 퍼그였다. 둘 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이 개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곧 무어크로프트는 답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이 개들은 무어크로프트가 영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흥분하여 그에게 달려들어 핥고 짖은 것이 분명했다. 이어 한참을 달래자 두 개는 군사 훈련을 받은 듯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중략) 이것은 러시아인들이 이미 그곳에 온 적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로부터 1825년에 죽을 때까지 무어크로프트는 캘커타의 상관들에게 열띤 목소리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서 벌이려는 일에 관해 줄기차게 경고를 했다.

                                                                                                                              - p. 130. 이상한 개 두 마리

이전 01화 왜 1차대전은 그토록 길고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는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