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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아련한 이야기에서, 뒤틀림과 파국의 이야기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부 - 마르셀 프루스트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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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밝아올 하루, 그리고 그 다음에 올 나날이
이제는 미지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니와,
내 고뇌의 연장을 가져오리라는 걸 느꼈다.



샤를리(모렐)가 자리를 뜰 때, 샤를뤼스 씨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자기한테 얼마나 착한지 뽐내며, 칭찬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샤를리는 자주, 신도들이 다 있는 앞에서, 분명히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남작이 바라듯 명랑하고 온순한 모양이 아닌 적이 있었다. 이런 짜증은, 나중에 샤를뤼스 씨가 모렐의 버릇없는 태도를 용서할 만큼의 약점마저 되고, 점점 더 바이올리니스트는 짜증을 감추려고 애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짜증이 난 체까지 하였다. 나는 샤를리가 그 군인 친구들과 함께 있는 찻간에 들어올 샤를뤼스 씨를, 친구들에게 눈짓을 덧붙인, 어깨를 으쓱해 맞이하는 꼴을 목격한 적이 있다. 또 어떤 때는 들어온 샤를뤼스 씨를 보고도, 사뭇 진저리하는 아무개가 오기라도 한 듯, 조는 체한 적도 있다. 혹은 그가 기침을 하기 시작하며, 다른 사람들은 웃어대며, 샤를뤼스 씨와 같은 사람들의 짐짓 꾸민 말씨를 우롱하려고 흉내내며, 샤를리를 한구석에 끌어당기며, 하는 수 없는 듯 샤를뤼스 씨 곁으로 돌아오곤 하였는데, 샤를뤼스 씨의 가슴은 그런 모든 화살로 꿰뚫렸다.

- 2권, p. 241.





. 지난 글에서 3부에 대해 리뷰하면서 3부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읽어내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했는데, 확실히 3부를 지나 4부에 이르면 글이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3부까지 소개된 인물과 배경들을 바탕으로 4부부터는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이야기가 본 궤도에 오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4부의 제목인 '소돔과 고모라'는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첫 이야기인 창세기에서 신의 분노를 받아 멸망한 두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 사드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동성애를 표현하는 데 '소돔'이라는 비유를 사용해왔던 것처럼(실제 sodomy라는 단어는 남자간의 동성애를 가리키고 있다) 프루스트는 남자들 간의 동성애에 빠진 샤를뤼스를(이건 사실이다) 소돔으로, 여자들 간의 동성애에 빠진 알베르틴과 그녀의 친구들(이라고 주인공은 생각하고 있다)을 고모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소생의 마차까지 와 달라고 인편을 통해 부탁했을 때, 당신은 더럽지 않은 말로 한다면, 세번째로 거절했사옵니다. 이 봉투 안에, 소생이 발베크에서 당신에게 줄 셈이던 고액의 행하를 넣지 않음을 용서하시기를, 소생으로서는 소생의 온 재산을 같이 나누기를 일시 생각했던 분에 대하여 이 정도의 액수에 그치는 게 얼마나 가슴아픈지 모르옵나이다. 적이나 당신의 레스토랑에서 네번째의 시도가 헛일이 되지 않도록 하옵기를, 소생의 인내도 한다고 있사옵기에(그리고 여기서 샤를뤼스 씨는 제 주소, 만날 수 있는 시각 등등의 지시를 적어 놓았다). 그럼, 안녕. 소생의 여읜 친구와 딱 닮은 당신이기에 아주 어리석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와, 그렇지 않으면 관상학이 거짓 학문일 테니까, 소생은, 어느 날 당신이 이 사건을 다시 생각할 때, 반드시 어떤 후회와 얼마간의 한을 느끼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소생 쪽은 이 사건에 대해 솔직히 말해 티끌만큼의 쓴맛도 품지 않는 걸 믿어 주시옵기를."

- 2권, p. 150.




. 3부에서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살롱에 참석한 주인공에게 자신과 동성애 관계를 맺는 대신 자신이 주인공의 후원자가 되겠다는 제의를 넌지시 돌려 말했던 샤를리스. 하지만 주인공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명확히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그의 제안에 거부감을 느낀데다 마침 할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할 여지가 없어지고, 주인공에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샤를뤼스는 주인공 대신 모렐(샤를리)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대신 동성애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샤를뤼스의 정체를 알게 된 주인공은 이전과 다른 눈으로 그를 지켜보게 되는데, 그래서 4부의 1권에서는 샤를뤼스가 모렐이나 다른 평민, 혹은 하인들과 관계를 가지고 그 과정에서 희화화되며 상처 입는 모습들이 상당한 분량을 들여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 그런 샤를뤼스의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너무 오랫동안 지켜봐왔기 때문일까. 주인공은 2부 이후 몇년만에 다시 재회한 알베르틴과의 가까워진 거리에 기대감을 품으면서도, 몇몇 미심쩍은 장면을 두고두고 떠올리면서 그녀 역시도 샤를뤼스처럼 그녀의 여자(사람) 친구들과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앞선 이야기들에서 프루스트가 보여줬던 것처럼 주인공의 그런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긍정과 부정과 확신과 반성을 거치며 끊임없이 이어지고, 커지는 의심은 독이 되어 그를 잠식해간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이 이야기는 심리 미스테리이자 호러물의 성격을 띠어가기 시작한다. 과연 주인공이 생각하는 것처럼 알베르틴은 정말 그런 관계를 맺고 있을까. 아니면 주인공의 의심과 과장에 불과한걸까. 그리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더 이상 알베르틴을 놓아줄 수 없게 된 주인공은 알베르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소유욕인지 집착인지 모호해진 경계선에 서서 - 너무나 뻔히 예견되는 파국에 고뇌하면서도 - 오로지 그녀를 곁에 두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와 함께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다.





알베르틴의 배후에서 내가 보는 건 이제는 푸른 바다의 봉우리가 아니었고, 몽주뱅의 방이었다. 그 방에서 그녀는 뱅퇴유 아가씨의 팔에 안겨, 그것을 생소한 향락처럼 들리게 하는 그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기호를 가진 뱅퇴유 아가씨가 알베르틴 같이 예쁜이한테 어찌 그 기호를 만족시켜 달라고 조르지 않았으랴? 또 알베르틴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고 동의했던 증거는, 둘의 사이가 나쁘지 않고 오히려 둘의 친밀함이 그치지 않고 커 가는 이 점이다. 알베르틴이 로즈몽드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생글생글 웃으며 로즈몽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 목에 입맞춘 그 우아한 동작, 뱅퇴유 아가씨를 내게 상기시켰던 그 동작,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려고, 한 몸짓으로 나타난 같은 교태가 반드시 같은 성벽의 결과로서 생긴다는 걸 시인하기에 주저했던 동작, 누가 알랴, 알베르틴이 그 짓을 뱅퇴유 아가씨한테서 직접 터득하지 않았는지? 흐릿한 하늘이 점점 환해졌다. 여지껏 지극히 수수한 것, 우유 커피잔, 빗소리, 바람의 우렁찬 소리에 미소받지 않고선 눈뜬 적이 없었던 나, 그 나는 곧 밝아 올 하루, 그리고 그 다음에 올 나날이 이제는 미지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니와, 내 고뇌의 연장을 가져오리라는 걸 느꼈다. 나는 아직 삶에 애착을 가졌는데, 거기서 기대할 것이 이젠 참혹한 것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 2권, p. 318.




. 이렇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4부에 들어서면서 변곡점을 맞이한다. 아름답고 아련했던 1부, 서툴고 안타까웠던 첫사랑의 마지막을 그려냈던 2부, 그리고 길디 길었던 3부를 지나 이제 이야기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잡아 본격적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물론 굳이 떠올려보자면 2부에서 알베르틴과 그녀의 친구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잠깐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기도 했고, 알베르틴이 친구인 앙드레와 춤추는 과정에서 잠깐 신체적 접촉이 있었던 걸 주인공이 보기도 했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너무도 옅게 지나간 장면이라 의미있는 이야기로 연결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는데, 프루스트는 3부부터 시작된 샤를뤼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이런 에피소드들을 다시 살려낸다. 과연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앞으로 어떤 뒤틀림과 파국을 불러올 지 알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5부와 6부를 계속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어머니에게 나는 말했다. "나는 엄마를 걱정시키려 해. 첫째 엄마가 원하듯이 여기 남지 않고, 나 엄마와 함께 떠나겠어. 그러나 이건 아직 아무것도 아냐. 이곳은 내 몸에 해로워, 돌아가는 게 좋아. 그리고 잘 들어요. 너무 상심 마시고. 저어, 나 거짓말했어. 어제 선의로 엄마를 속였어, 밤새워 곰곰 생각해봤지. 꼭 해야 해, 당장 그것을 정합시다, 나는 지금 찡하게 알아차리니까. 다시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 살아갈 수 없을테니까. 나는 꼭 해야 해, 알베르틴과 결혼하고 말 테야."

- 2권, p.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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