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부 - 마르셀 프루스트 ●●●●◐○○○○○
되풀이하네만 매일 자네를 만나,
자네부터 성실과 신중의 보증을 받을 필요가 있소.
나는 "할머니, 할머니" 하고 외치며, 할머니를 꼭 껴안고 싶었지만, 내 곁에는 그 목소리, 할머니가 앞으로 죽을 때, 어쩌면 나를 찾아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유령 못지않게 촉지되지 않는 유령 뿐이었다. "말씀하세요" 하고 외쳤으나, 그때 나는 더욱 외로이 버림받아, 별안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이제 할머니는 내 목소리를 못 들으며, 나와 통화 중이 아니었으며, 우리가 서로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서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소리의 어둠 속을 더듬어가면서 계속해서 할머니를 불러대고, 할머니의 부름 역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느꼈다.
- 1권, p. 172.
. 3부는 이 소설에서 가장 읽어내기 어려웠다.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되어 어린 질베르트와 어린 주인공이 만나는 아련한 이야기가 흐르던 1부와, 질베르트와 헤어지는 쓸쓸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2부에 비해(물론 1, 2부가 쉽다는 건 아니다^^;) 3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샤를뤼스 씨나, 게르망트 공작 부처, 로베르 등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비중을 차지하게 될 인물들이 어떤 이들이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진 인물들인지를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부분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전개는 이미 2부 중후반부터 시작되어(그래서 2부가 1부에 비해 좀 더 힘들다) 3부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3부 1권 중반부에서 잠시 할머니의 죽음을 다루는 부분을 제외하면 세 권 연속으로 사교계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담소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프루스트는 읽는 이의 버거움엔 조금도 관심이 없다(....)
. 그나마 3부의 끝없는 담소 중에선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유대인 출신 장교인 드레퓌스가 군 기밀을 독일에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가게 된 이 사건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완전히 양분해버린 사건이었다. 사건의 진실은 물론, 당시 전 유럽적으로 한창 대두되고 있던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 통일 독일에 대한 공포 등 유럽 세계 자체를 놓고 벌어진 대규모 격론에 프루스트 역시도 적극 뛰어들었고, 그래서 작품 속에서도 상당한 페이지를 들여 이 사건에 대한 당시의 분위기를 그려낸다. 아직 3부를 쓰던 시점에서는 이 사건이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기 전이었기에 어느 쪽의 말이 사실인지 대놓고 손을 들어주지는 않고 있지만.
드레퓌스 사건에 한해서 말한다면, 그 후, 앙리의 자백에 이어 자살 같은 큰 소동이 났을 때, 이 사실은 드레퓌스 파인 각료와 또 스스로 문서 위조를 발견했고 심문을 행한 카베냐크와 키녜에게 정반대로 해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드레퓌스 파의 각료들, 빛깔이 같은 그들 사이에마저, 동일 증거물로 판단할 뿐만 아니라 같은 정신으로 판단하는데도, 앙리의 역할은 전혀 반대되는 투의 설명을 받았으니, 어떤 자는 에스테르아지의 공범자로 보고, 어떤 자는 그와 반대로, 이 역할을 파티 드 클랑이 한 것으로 보고, 곧 적인 키녜의 설에 가담하여, 동지인 레나크와 완전히 대립하였다.
- 1권, p. 314.
.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3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1권 마지막에 잠깐 나왔다가 3부부터 주인공에게 본격적으로 접근하는 샤를뤼스의 등장이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사촌으로 높은 신분과 막대한 재산, 젠틀한 매너와 뛰어난 지적 능력을 두루 갖춘 그는 자신이 기꺼이 주인공의 후견인이 되겠다며(나중에 얘기가 나오지만, 미혼이어서 - 미혼일 수밖에 없기에 - 아이가 없다) 대신 성실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보답을 하라고 한다. 샤를뤼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주인공은 결국 그의 말을 그냥 흘려버림으로써 그와 거리를 두게 되는데, 이 묘한 대화를 기점으로, 이야기 중후반부 여러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에 휘말려 든 주인공의 의심과 오해와 아이러니와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샤를뤼스 씨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내게 말하였다. "잘 생각해 보게, 며칠 여유를 주니 편지를 보내시오. 되풀이하네만 매일 자네를 만나, 자네부터 성실과 신중의 보증을 받을 필요가 있소. 하기야 자네는 이미 그 보증을 보이고 있는 성싶네만. 그러나 내 생애 중에, 외양에 여러 번 속아서 다시는 외양을 신용하고 싶지 않소. 제기랄! 보물을 포기하기에 앞서 적이나 어느 손에 내놓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소. 아무튼 내가 자네에게 제공하려는 것을 생각해 보시게. 자네는 헤라클레스처럼, 불행하게도 자네는 그 센 근육을 못 가진 듯하네만, 두 길의 기로에 서 있소. 미덕으로 인도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음을 평생 두고 후회 안 하도록 하시게.
- 1권, p. 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