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부. 마르셀 프루스트 ●●●●●●○○○○
우리 기억의 가장 좋은 부분은 우리의 바깥, 곧 비를 몰고 오는 바람,
방의 고리타분한 냄새 또는 불붙기 시작한 축축한 장작 냄새 속에 있다.
내가 질베르트에게 '인생은 우리 둘 사이를 떼어 놓았는지는 모르오나, 우리 둘의 마음이 서로 통하던 시절의 추억은 남을 것입니다'라고 써 보낼 때마다, 그녀는 또박또박 '인생은 우리 둘 사이를 떼어 놓았는지는 모르오나, 우리 두 사람에게 영원토록 그리울 좋은 시절은 망각시키지는 못하겠지요' (왜 '인생'이 우리 두 사람을 떼어 놓았는지,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말하라고 하면 둘 다 당황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제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날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샹 젤리제의 보리과자 장수 할머니의 죽음을 알았노라고 말하면서, '이 소식에 당신은 가슴 아파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이 소식에 갖가지 추억이 소용돌이쳤습니다'라는 말을 막 쓰고 난 나는, 살아 있는 것으로, 적어도 되살아날 수 있는 것으로 마지못해 계속해 온 그 사랑을, 마치 이미 망각해버린 죽음에 관한 것처럼 과거형으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넘치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 1권, p. 294.
. 지난 글에서 프루스트가 "더없이 아름답고 아련한 문장의 이면에서 내내 차가운 눈을 하고 있다"는 말로 1부의 리뷰를 마무리했는데, 실제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점은 작가가 다른 등장인물을 물론 작가 자신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주인공에 대해서도 냉정한 시선으로 그의 행동과 말, 생각 하나하나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이 소설을 더욱 읽기 팍팍하게 만드는 점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난장판이 장황하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장광설이 끝이 없다고들 하지만 프루스트의 살롱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대화에 비견될 수 있는 소설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겨우 간신히 살롱 부분을 벗어나 주인공과 질베르트, 그리고 2부부터 등장한 알베르틴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우유부단이라는 단어로는 턱없이 모자랄 정도로 주인공의 생각이 손바닥 뒤집듯 계속 바뀌고, 그 생각 하나하나를 묘사하는데 수 줄, 수 페이지가 소요된다. 그러니 작은 사건 하나에 대한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데는 자연히 수십 페이지가 필요해진다.
.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당연히 이 쪽이 진실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if를 세우고 그 if마다 현실적인 생각에서부터 택도 없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각의 늪에 빠진다. 다만 그런 갈팡질팡하던 자신은 내면 속에 감추고 밖으로는 정리되어 선택한 결정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한 인물이 갈팡질팡하는 수많은 생각의 갈래길과 비약과 포기를 모두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설령 그게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인물을 포장하지 않는다. 타협하지도 않는다.
그해의 정월 초하루는 유달리 괴로웠다. 불행할 때 시기가 바뀌거나 기념일이 오거나 하면 다 그렇다. 그러나 만약에 그 불행이, 예를 들어 친한 사람을 잃었다는 데서 비롯한 거라면, 쓰라림은 단지 과거와 현재의 대조가 날카로움을 더하는 데 그친다. 나의 경우에는 거기에 희망, 이를테면 질베르트는 화해의 첫걸음을 내가 솔선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는데, 그것이 실행되지 않음을 알고는, 주로 정월 초하루라는 구실을 기다려 오다가, '아니 왜 그러시죠? 나는 당신에게 빠졌어요. 둘이서 속속들이 털어놓고 말하게 와 주세요. 당신을 보지 않고서는 못 살겠어요'라고 나에게 편지 써 보내는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허망한 희망이 곁들여져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 옴에 따라 그런 편지가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았다. 허망일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 실현을 믿기에는 그것에 대한 소망과 욕구만 마음에 있으면 족하다.
- p. 1권, p. 260.
. 그렇기에 마냥 읽기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야기 속에서 갑자기 문장 하나하나가 눈으로 날아들어와서 마음 속에 박히는 부분이 있다. 멈춰있던 손을 정신없이 움직여서 매 쪽마다 문장을 옮겨적어야 할 때가 있다. 인물이 거울 저편의 나라는 걸 깨닫게 될 때다. 인물과 나 자신이 겹쳐질 때다. 프루스트의 질릴 정도로 세세한 서술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건 일반적인 이야기에 불과해', '이건 그냥 얼추 비슷할 뿐이야'라는 변명으로 도피하지 못하게 한다.
. 또한 주인공의 흔들리는 심리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함으로써, 프루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의 말과 생각을 영 미심쩍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질베르트와의 반짝거리던 연애가 씁쓸한 결말로 끝날 게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어린 주인공은 한 순간에 깨뜨려질 온갖 엉성하고 빈약한 방어기제를 만들어 둔 채 사슴이 풀숲에 목만 숨기고 안심하는 것처럼 그 속에 숨으려 들고, 그런 모습은 읽는 이를 민망함에 오그라들게 하고 이불 속에서 발버둥치게 만든다. 게다가 온 마음을 기울이던 연애가 끝나고 후유증에서 오는 아픔에 수십쪽을 들여 슬퍼하다가도 다른 이성을 보자마자 금세 그쪽에 관심을 보여 또 수 페이지를 들여 그 마음을 묘사하는 강박과도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어가다보면 독자는 어느 새 자연스레 주인공의 합리화와 변명과 변심에 익숙해진다. 더 이상 주인공의 말을 - 그게 실제 말이든 마음 속의 말이든 -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마냥 믿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알베르틴이 고집 세게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어 더욱 더 무뚝뚝한 대꾸를 계속하다가, 지젤이 무슨 말을 해도 일언반구 대답하지 않아 드디어 지젤이 물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그처럼 불쾌한 태도를 취한 점을 책망했다. "그래야 좀 조심성 있게 구는 법을 배우지. 나쁜 애는 아니지만 짓궂어요. 그렇게 무엇에든지 참견할 게 뭐람. 뭐 때문에 찰떡같이 붙는다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썩 꺼지라고 말할 뻔했다니까요. 그리고 또 그 머리 모양이 뭐예요. 망측하게. 악취미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니까." 알베르틴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볼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볼이 어떠한 향기, 어떠한 맛이 날까 생각했다.
- 2권, p. 342.
. 이렇게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프루스트는 주인공을 변호하기는커녕 본인이 가장 앞장서서 주인공을 - 그리고 자신을 까발긴다. 그리고 이런 프루스트의 방법은, 지금 당장은 왜 이렇게 구구절절, 혹은 구질구질한건가 싶은지 몰라도 소설의 뒷부분에 접어들어 메인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다. 아름답지만 장황하고 지루했던 이야기는 어느 새 독자를 손아귀에 쥐고 들었다놨다 하기 시작한다. 물론 (꼭 추리소설이 아니라도) 마지막을 위해 초중반부를 일부러 소모하는 게 특별한 기법은 아니겠지만, 그 스케일이 7부 11권(국일미디어 판 기준으로) 중 수년을 들여 쓴 서너권을 통째로 소모하는 정도에 이르면 '감탄한다'는 정도로는 도저히 읽고 나서 느낀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다. 실제로 후반부를 읽기 시작하면서 이 거대한 구성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왜인지 목이 메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노르망디 체류 중, 나는 발베크의 방파제에서 엇갈린 모르는 사람이 '체신부 장관의 가문'이라고 한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 가문이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갖게 되어 있는지 그때에 나는 모르고 있어서) 이 말은 내게 좋은 새 소리로 들렸어야 마땅하련만, 갑자기 심한 고통을 일으켰다.
그것은 전에 질베르트와 이별할 때 자아가 느끼던 고통, 거의 소멸해 버렸을 옛 자아가 느끼던 그 고통이었다. 전에 질베르트가 내 앞에서 그 아버지에게, '체신부 장관의' 가문에 관해서 뭔가 이야기하던 것을, 그때까지 잊어 오다가 이 때 처음으로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랑의 회상이라는 것도 기억의 일반적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아, 기억의 일반적 법칙 자체가 습관의 보다 보편적인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 습관은 만사를 약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망각했던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어떤 존재를 가장 잘 생각나게 한다(그도 그럴 것이, 망각했던 그런 것은 하찮은 것이었으며, 또 그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본디의 힘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우리 기억의 가장 좋은 부분은 우리의 바깥, 곧 비를 몰고 오는 바람, 방의 고리타분한 냄새 또는 불붙기 시작한 축축한 장작 냄새 속에 있다.
- 2권, p.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