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부. 마르셀 프루스트 ●●●●●●◐○○○
홍차나 보리수 꽃을 달인 물을 담근 후
내게 주던 그 마들렌의 작은 조각의 맛이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는 촛불을 끄자마자 즉시 눈이 잠겨서 '잠드는구나'하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 시간 후,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각이라는 생각에 깨어난다. 아직 손에 들고 있으려니 여기는 책을 놓으려고 하며, 촛불을 불어 끄려고 한다.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에 대한 회상은 깜빡한 사이에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회상은 야릇한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곧, 책에 나온 성당, 사중주,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의 대결 등등이. 흡사 나 자신의 일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깨어난 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되는데, 그것은 나의 이성에 별로 어긋나지 않지만, 단지 비늘처럼 눈을 덮어 버려, 촛불이 이미 꺼지고 있는.... (후략)
- 1권, 도입부.
. 마르셀 프루스트는 서른 여덟 살이었던 1909년부터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6년 전인 1903년에 아버지를, 그 다다음해인 1905년에 어머니를 차례로 여의는 것과 함께 어린시절부터 앓고 있었던 천식이 악화되었고 신경 쇠약으로 외부의 자극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여읜 후 4년 동안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밤낮으로 회상록과 수필과 소설이 혼재된 어마어마한 분량의 글을 써내려가던 프루스트는 -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 1909년 추운 겨울,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홍차를 마시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홍차의 맛과 온기와 결합되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써야할 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창을 이중으로 달고 벽에 코르크를 빼곡히 붙여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덧문마저 폐쇄해 냄새까지도 차단했다. 그 방에서, 그동안 그가 써왔던 어마어마한 분량의 글들이 하나 둘 순서를 맞춰 늘어놓아지고 그 위에 살이 덧대어져 작품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 시절의 주일 날 아침(그날은 언제나 미사 시간 전에는 외출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레오니 고모의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 고모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 꽃을 달인 물을 담근 후 내게 주던 그 마들렌의 작은 조각의 맛이었다.
그런데 레오니 고모가 나에게 준, 보리수 꽃을 달인 더운 물에 담근 한 조각 마들렌의 맛임을 깨닫자(왜 그 기억이 나를 그토록 행복하게 하였는지 아직 모르고, 그 이유의 발견도 한참 후일로 미루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즉시 거리에 면한, 고모의 방이 있는 회색의 옛 가옥이 극의 무대장치처럼 나타나, 이 원채 뒤에 나의 양친을 위해 뜰을 향해 지어진 작은 별채와 결부되었다(중략)
그리고 이 회색의 가옥과 더불어, 마을, 점심 전에 심부름을 가곤 했던 한 광장,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떠한 날씨에도 내가 쏘다니던 거리들, 날씨가 좋을 때만 다 같이 걸어간 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치 일본 사람이 재미있어 하는 놀이 - 물을 가득 채운 도자기 사발에 작은 종이 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할 수 없던 종이 조각이, 금세 퍼지고, 형태를 이루고, 물들고, 구분되어, 꿋꿋하고도 알아볼 수 있는 꽃이, 집이, 사람이 되는 놀이를 보는 것처럼, 이제야 우리들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스완 씨의 정원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비본 내의 수련화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과 그들의 조촐한 집과 성당과 온 콩브레와 그 근방, 그러한 모든 것이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려, 마을과 정원과 더불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 1권, p. 69-70.
. 나름 그 동안 꽤 이런저런 책을 읽고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이 책을 읽는 건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잠자리에 대한 아련한 묘사, 어머니에 대한 애착,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들렌'에 대한 묘사까지만 해도 조금 장황하다 싶긴 하지만 아름답고 아련한 문장 하나하나로 이뤄진 감상적인 글이라고 생각하며 문장 하나하나를 느긋하게 옮겨적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그렇게 읽는 이가 편안하게 - 그리고 '익숙하게' 자신의 글을 읽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조금' 장황하다고 생각했던 글은 어느 새 줄거리와는 관계없는 곳에서 작가의 생각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져 간다. 정신을 부여잡고 문장 하나하나를 따라가보아도 그 끝은 출구 없이 막혀 있고, 거기서 다른 첫 문장이 시작되어 또다시 끊임없이 이어져 간다. 거기다 2권에 이르러 본격적인 사교계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 책을 읽는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할 사교계에서의 끝없는 담소가 책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여기서 이 끝없는 담소에 어떻게든 익숙해져야 한다. 2, 3, 그리고 4부로 가면 갈수록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은 담소의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프루스트는 이 거대한 소설에서 이런 담소를 일종의 '무게추'처럼 사용한다. 대화 하나하나가 어떤 확실한 의미를 가진다기보단, 끝없는 대화가 진행되어 가는 와중에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이야기 속에서의 역할과 비중이 결정된다. 프루스트는 읽는 이를 위해 방향을 제시하지도 이야기를 정리하지도 않는다. 읽는 이 역시 이야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면(문장 자체를 즐기는 건 별개로 하더라도) 모든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을 필요도 없고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도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예술 애호가이자 상류 계급의 '신사'인 스완과 무척 아름답긴 하지만 신분도 지성도 성품도 어디 하나 볼 것 없는 오데트 사이에 연애가 시작되었다가 그 설렘과 열정이 의심과 냉소로 바뀌어가고 둘의 관계가 맥빠지고 냉랭해져 끝을 향해가는 걸 보게 된다. 담소와 담소와 담소들(....)이 흘러가는대로 함께 휩쓸리다보면 어디엔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하나 또 하나, 소심한 참새처럼 그녀의 친구인 소녀들이 눈 위에 검게 모여들었다. 우리는 놀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처럼 슬펐던 이날을, 기쁨 속에 마치게 되어 있었던지, 내가 술래잡기를 하기에 앞서, 그 첫날, 무뚝뚝한 목소리로 질베르트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던 친구 소녀에게 가까이 가자 그 소녀는 나보고 말했다. "아냐, 아냐, 네가 질베르트의 편에 들고 싶어하는 걸 다 알고 있어. 게다가 저것 봐, 질베르트가 손짓하고 있지." 사실, 질베르트는 눈의 잔디 위에서, 나보고 그녀의 편으로 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태양이 그 진지에 장밋빛의 반짝임을, 금박 넣은 옛 비단의 낡은 금속빛을 내리비춰 금사의 진영을 방불하게 하였다.
- 2권, p. 310.
. 한편 그런 담소들 바깥에선 또 한 번 시간대를 뛰어넘어 스완의 딸인 어린 질베르토와 어린 주인공이 만나는 풋풋한 이야기가 반짝반짝 빛을 낸다. 그렇게 이야기의 여운을 한껏 음미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분부분 실루엣으로 등장하는 질베르트의 어머니가 누구일지를 궁금해하다보면, 1부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머니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순간 당황과, 충격과 함께 이리도 아름답고 아련한 문장이 이어져 가는 이 글이, 실제로는 이토록 냉정하고, 이토록 가차없는 글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없이 아름답고 아련한 문장의 이면에서 프루스트는 내내 차가운 눈을 한 채 인물들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글에서도, 이런 프루스트의 냉정함은 여전히 이어진다.
느닷없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꼼짝 못했다. 흡사 어떤 시각의 형상이 단지 우리의 시선에 말을 건네 올 뿐 아니라, 훨씬 깊은 지각을 요구하고, 우리의 온 존재를 수중에 넣고 마는 때처럼. 불그레한 금발의 소녀 하나가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인 듯 손에 원예용 삽을 든 채, 장밋빛의 주근깨가 뿌려진 얼굴을 쳐들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검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강한 인상을 그 객관적인 여러 요소로 이끌기는 당시는 물론 그 이후도 나의 힘으로는 벅찼으며, 더구나 눈빛의 인상만을 따로 떼어놓는 이른바 '관찰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 후 오랫동안 이 소녀를 상기할 때마다, 소녀가 금발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눈빛이 금세 선명한 하늘빛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 1권, p.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