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인데 아름답고, 추리소설인데 따뜻한

유리기린 - 가노 도모코 (노블마인) ●●●●●●●●◐○

by 눈시울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면 그럼 대체 뭐였습니까?
비어있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든 게 없는 텅 빈 상자, 빈 병이라든지,
빈 캔, 비치 볼.... 그래요.

종이풍선이라든지.




. 가노 도모코의 글은 참 매력적이다. 화려하거나 수식이 많은 문장을 쓰지 않고, 언제나 간결하고 덤덤하게 이야기해나가기 때문에 언뜻 읽기엔 별 특징이 없어보이지만 읽고 있자면 이건 그녀의 글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다. 솔직하고, 따뜻하고,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라고 해야할까. 쉽지만 허투로 읽을 수 없고, 무엇보다도 문장 하나하나를 읽는 게 즐겁다. 보통 추리소설은 본격적으로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은데, 가노 도모코의 글에서는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문장을 읽는 재미에 빠져 사건이건 복선이건 함정이건 정작 추리해야 할 부분을 제껴두는 경우는 있었지만. :)


. 앨리스 시리즈에서 은퇴하고 꿈을 좇아 탐정사무소를 연 아저씨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청순하고 발랄한 소녀의 작고 훈훈한 모험담을 다뤘던 가노 도모코는 이번 작품에서는 확 다른 분위기를 선보인다(엄밀히 말하면 앨리스 시리즈보다는 유리기린이 먼저다) 마치 회백색 하늘을 연상하게 만드는 조용하고 쓸쓸한 늦겨울 낮. 한 소녀가 칼에 찔려 살해당하고, 소녀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살해당한 소녀에게 빙의된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소녀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일에 지친 소녀의 담임선생님, 친구 아버지의 지인, 소녀의 또 다른 친구, 소녀가 우연찮게 알게 된 다른 여자 등을 하나하나 유심히 비추며 돌아가고,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그녀가 왜 죽었는지를 파고든다.


. 개개의 단편 중에선 '유리기린'과 '3월 토끼'가 좋았다. 유리기린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아버지의 눈을 통해 어느 날 갑자기 살해당한 친구에 빙의된 것 같은 행동을 하는 딸을 바라보는 이야기이고, 3월 토끼는 일에 치이고 아이들과의 간격에 지쳐버린 한 선생님의 이야기이다. 두 작품 모두 미스테리로서는 소소하지만 유리기린에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마음에 와닿았고, 3월 토끼에서 선생님의 입을 빌어 묘사하는 세세한 수다나 일과 아이들과 개인사에 대한 이런저런 소소한 푸념들이 좋았다.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살짝 지쳐서 조금은 자조적인 말투로 이야기하는 등장인물들은 싫지 않다. :)


. 가노 도모코는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에 여러 형태의 어둠을 투영한다. 그것은 이유없이 일그러져 버린 마음이기도 하고, 때로는 타인이 보기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 무엇보다 큰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하고, 혹은 어떤 특정한 시절에 한 번씩 우리를 사로잡고 가던 공허와 결락이기도 하다. 일에 지쳐버린 사람도 있고, 자신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작중에서 탐정 역할을 맡은 진노 나오코는 사건 뒤에 있는 어둠을 이해하는 것으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결해가면서 때로는 사람들의 어둠을 치료하고 그들을 북돋아주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탐정인 동시에 치료하는 사람이기도 한 셈이지만, 그렇게 사려깊고 서늘하게만 보이는 그녀에게도 과거에 겪었던 상실로 인한 어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어둠은 이런저런 사건들을 해결하고 소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커져간다. 그렇게 나오코 스스로가 이 어둠과 마주하게 될 때 그녀를 구하는 것은 어떤 것일지. 가노 도모코는 나름의 답을 준비해놓고 있다. 극적인 해결이나 반전에 기대지 않은 채 왠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왠지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그녀 식의 희망을 찾아서. 그래서 나는 그녀의 글을 정말 좋아한다.





내 물음에 상대방은 엷게 웃고 고개를 저었다.

"불행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 분명히 천벌을 받을걸요.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던 생활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한 번도 없었어요."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면 그럼 대체 뭐였습니까?"

"텅 비어있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든 게 없는 텅 빈 상자, 빈 병이라든지, 빈 캔, 비치 볼.... 그래요, 종이풍선이라든지."


마지막 비유가 그녀의 기분과 가장 비슷했나 보다. 그녀의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종이풍선을 뒤쫓듯 단 한 번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다양한 색깔의 얇은 일본 종이를 이어 붙여 만든 아름다운 종이 풍선. 그것은 아무리 우아하게 공중을 날아도, 다음 순간 간단히 납작하게 짜부라질 수 있는 연약함과 불안정한 위태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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