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회색 뇌세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by 눈시울


그 날은 화씨 80도(26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운 날씨였습니다.
그런데 잉글소프 노부인은 불을 피우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포와로가 처음 등장해서 하는 아래의 일장연설은 향후 50년 넘게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야기의 핵심이 된다. 등장인물의 일거수일투족 정도야 어느 추리소설에든 당연히 파악해야하는 거지만, 크리스티의 소설은 잡담에 개그에 연설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에 온갖 복선과 암시가 널려있어서 한 줄이라도 빼먹고 대충 읽었다가는 사건 해결을 읽어도 이런 부분이 있었던가 싶기 때문에. 심지어 이름의 모음 하나만 바꿔서 잘못 부르는 식의 오타로 착각할 만한 일조차도 그냥 넘겼다가는 여지없이 뒤통수를 맞기 일쑤다. (그런데 해문판은 나온지가 워낙 오래되었기 때문에 진짜 오타가 있다!!! ;;)




"사소하지만 순리에 어긋나는 사실, 어쩌면 전체적인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하찮고도 시시한 사실을 그 부분에 놓아 보는 걸세!" 그는 커다랗게 손짓을 해보였다. "그것이 의미있는 거야!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그 - 래 - 요 - ?"

"조심하라고! '그건 너무 조그만 일이야 - 그건 중요하지가 않아. 그것은 다른 사실과 어울리지 않아. 그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될 거야.'라고 말하는 탐정에게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라네. 혼란은 바로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건 해결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어!"


- p. 53.




. 무려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활동을 했기 때문에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은 20세기 초반과 중반을 전부 다루고 후반에도 살짝 걸쳐있는데, 첫 소설인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당해서 휴양을 위해 지방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게 된 헤이스팅즈는 독일의 점령을 피해 피난을 온 포와로라는 은퇴한 벨기에 경찰과 재회하게 된다. 그가 머무는 '스타일즈 저택'은 그의 어머니인 대지주 앵글소프 노부인부터 그녀의 아들과 며느리들에 말동무와 하인과 하녀들까지 모두 한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영국의 대저택인데, 이런 대가족들 사이에 앵글소프 노부인의 두 번째 남편인 젊은 앨프리드 앵글소프가 끼어들면서 막대한 재산을 놓고 가족들 간에는 긴장이 감돈다. 결국 노부인이 누군가에게 맹렬한 분노를 터뜨린 날 밤에 노부인은 독살당하게 되고, 노부인을 죽인 범인은 물론 그녀가 분노를 터뜨린 대상도, 그녀의 유언장의 행방도 미궁에 빠진다. 하지만 이렇게 운이 없는 범인이라니. 그 저택에서 은퇴한 경찰이었던 에르큘 포와로는 명탐정으로 첫 선을 보이게 된다.




"진짜 증거라는 것은 대개 모호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법이야. 따라서 그런 것들은 조사해 봐야 해 - 그것도 엄밀하게 말일세.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은 모두 판에 박은 듯이 너무 정확하고, 오히려 진부하기조차 하다네. 헤이스팅스, 이런 증거는 누군가가 아주 교묘하게 만들어 낸 것이라네."


- p. 152.




. 이후 나온 작가들이 크리스티 때문에 더 이상 쓸만한 트릭이 남아있지 않다고 투덜거릴 정도로 애거서 크리스티는 데뷔 후 30년 동안(....) 온갖 트릭과 복선을 쏟아냈는데, 최초의 소설이었던 이 작품에서도 트릭에 잔뜩 힘을 준 것이 눈에 확 띈다. '왜 피해자가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일이 중요한 걸까?', '왜 더운 날씨에 난로에 불을 켠 거지?' '왜 그는 뜬금없이 새벽에 돌아다녔을까?' 같은 수많은 질문이 쏟아져나오고, 이 질문들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는 질문이기도 하고 전혀 상관없는 함정이기도 하다. 여기에 추리소설이면서도 로맨스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찌보면 그 동안 코난 도일이나 체스터튼, 푸트렐 등의 간결한 소설에 익숙해져 있던 편집자들이 계속 퇴짜를 놨던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누가 봐도 홈즈-왓슨을 차용한 이인조 구성인데 탐정은 땅딸막하고 괴상한(^^;) 콧수염을 기른 외국인 할아버지라니! 늘씬하고 분위기 있는 홈즈나 날렵하고 멋진 뤼팽이 한창 영국과 프랑스 양 쪽에서 인기를 양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캐릭터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밖에. 그저 수많은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여사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신 덕에 - 이 소설은 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6년에 쓰여졌지만, 무려 4년이나 퇴짜를 맞는 바람에 1920년에나 나왔다고 한다 - 50년이 넘게 이어지는 크리스티 월드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게 다행이다. :)


. 작은 키, 달걀 같은 대머리, 멋진 콧수염, 벨기에인, 회색 뇌세포를 가진 탐정이지만 허영심과 장난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포와로의 길고 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소설에서는 그의 단짝 헤이스팅즈도 훤칠하고 모범적인 영국 신사지만 성급하고 푼수끼가 있고 금세 사랑에 빠지는 망가지지만 우스꽝스럽지는 않은 캐릭터로 처음 등장하는데, 이런 둘의 모습은 뒤이어지는 골프장 살인사건과 포와로 수사집에서 한결 뚜렷하게 업그레이드 되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모를까, 읽었다면 이어지는 시리즈도 꼭 추천. :)




포와로는 몸집이 작고 묘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는 5피트 4인치(164cm)가 채 되지 않는 왜소한 체구였으나, 언제나 근엄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달걀 모양의 머리를 언제나 한쪽으로 기울여 갸우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콧수염은 매우 뻣뻣했으며 군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리고, 그의 옷차림은 언제나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쑥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먼지 하나가 총탄으로 입은 상처보다도 더 큰 고통을 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멋을 부린 조그마한 남자는 유감스럽게도 몹시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는 한때 벨기에 경찰국의 가장 유능한 형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형사로서 그의 재능은 남달리 뛰어났으며, 당시에 가장 복잡한 몇몇 사건을 해결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다.


-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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