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이란 미스터리어스한 사건을 세상의 이해 속으로 돌려놓는 영웅이니까요. 여러분이 UFO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 편이 이상할지도 모르겠군요.
. 고립된 산과 섬, 마을에 이어 이번엔 종교집단이다. 몇년만에 나온 이번 편에서도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인 클로즈드 서클은 계속된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에는 클로즈드 서클이 아니었지만, 마을을 장악한 종교집단에서 방문객을 억류하고 외부로 통하는 전화를 두절하고(배경이 1990년이니 아직 휴대폰이 없다), 국도로 나가는 길을 봉쇄하면서(응?) 클로즈드 서클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엔 시골의 깊은 마을을 종교집단이나 정치단체들이 장악하고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딱히 작위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 역시도 이러한 외딴 시골 공동체에 고립되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야기이니까 - 사실 정말 씁쓸하지만, 신안 노예사건에서 봤던 것처럼 딱히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기도 하다 - 그나마 그게 섬뜩함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전편인 '쌍두의 악마' 때만큼이나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인 EMC(에이토 대학 미스테리 클럽)의 멤버들이 몸바쳐서 열혈몸개그 맹활약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본격추리작가이자 성공한 엘러리 퀸 덕후인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이번에도 책 말미에 독자에 대한 도전장을 던진다. 어떻게 생각하면 원조인 퀸보다도 훨씬 독자와의 정면대결에 큰 비중을 두는 작가이기 때문에, 이 책의 트릭도 살짝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무리한 반전이나 잔꾀없이 어느 정도 상식선에 위치하고 있고 본격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어느 정도까지는' 풀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냥 줄줄 읽어서는 도저히 풀 수 없고, 공책과 책을 집어들고 꼼꼼하게 시간대를 체크하고 인물을 정리해가면서 성심성의껏 읽어야 가능하지만. 이 장르가 낯선 독자로서는 뭔 소설 하나 읽는데 그렇게 쌩고생을 해야 하나 싶을수도 있겠지만, 원래 본격추리는 많은 부분 '논리적인 수학'을 떠올리게 하는 장르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연필을 잡고, 직접 써가면서 풀어야 한다. 성심성의껏 풀어내다간 뒤통수를 맞기 일쑤인 반전물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게 신본격류다.
.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오랫동안 따라온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드디어 시리즈 내내 믿음직하고 멋진 탐정이긴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슬쩍 피하기 일쑤였던 에가미 지로 선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 시리즈 첫 소설이었던 '월광게임'에서는 인물 소개하고 트릭 풀어내기에 바빴고, 이어지는 '외딴 섬 퍼즐'과 '쌍두의 악마'가 히로인인 아리마 마리아 위주로 흘러갔다면, 4편에서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드디어 에가미 선배의 과거를 풀어낸다. 점술과 예언에 심취해 아들들의 죽음을 예언한 어머니와 예언대로 죽은 장남, 장남의 죽음에 망연해서 사라져버린 아버지, '학생인 채로 죽는다'는 예언을 받고 예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가미 선배. 그런 암울한 가족사가 등장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사건에 휘말리고 EMC 멤버들과 사건을 풀어가며 그 과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 남아있다는(!) 마지막 작품에서는 모두와 함께 졸업하는 행복한 완결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된다.
. 이렇게 정말 간만에 나온 '여왕국의 성'을 완독한다. 떠올려보면 2007년 말 일본 추리소설 붐을 타고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첫 소설인 '월광게임'이 나왔던 시점에서 10년. 그 동안 월광게임을 출간했던 출판사의 추리소설 팀은 아리스가와 아리스, 요코미조 세이시 등 번역작품의 연이은 성공으로 확장되어 당당히 내부 브랜드를 런칭했고,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단편집을 냈으며(정작 5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후속작은 내지 않았으면서!) 에가미 선배만큼이나 장기 백수학생이었던 나는 간신히 밥벌이를 하며 추리소설을 즐기는 직장인이 되었다. 이렇게 시리즈물에선 작가와 출판사와 탐정과 독자가 동시에 나이를 먹어간다. 이러니 미스테리 독자들은 항상 주변 안전에 유의하고, 건강 관리에 신경쓰면서, 아무쪼록 오래오래 살아서 완결을 봐야 할 책무가 있다. :)
"아니,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어. 검은 옷을 두른 너희가 어둠을 틈타 구해주러 오기를.... 중요한 걸 깜빡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