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의 기사 - 시마다 소지(시공사) ●●●●●●○○○○
. "로맨틱 워리어"는 이후에도 자주 들었다. 칙 코리아의 이 걸작은 지금도 내게는 소중한 레코드다. 조용조용 곡이 시작되고 뮤지션이 한 사람 한 사람 악기 순서대로 솔로를 하다가 마지막에 칙 코리아의 피아노 차례가 될 쯤에는, 나는 언제나 철마에 올라타고 씩씩하게 아라카와 강둑에 나타났던 이십대의 미타라이 기요시를 떠올린다.
- 이방의 기사 마지막 부분.
. 신본격을 쓰는 작가들이 꼭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트릭에만 집중하다보면 글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아야츠지 유키토는 시리즈마다 건물을 만들어내는데만 매달려서인지 건물 묘사를 제외하면 영 지루하고,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작품마다 악전고투하는 게 눈에 보이긴 하는데 노력에 비해선 결실이 너무 적다보니 읽는 입장에서 안타까울 정도(하지만 분명 나아지고는 있다). 그나마 우타노 쇼고가 확실히 신본격 작가들 중에선 확실히 '읽히는 글'을 쓰는 재능이 있는 듯하다. 시마다 소지 같은 경우는 좀 특이한데, 같은 작가의 작품 내에서도 정말 같은 사람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작품마다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기묘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처럼 역대급의 걸작이 있는 반면에, '마신유희'처럼 대필작가가 써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 싶은 망작 중의 망작도 있다. 그런 시마다 소지가 쓴 이 작품은 어떨까.
. 주인공인 이시오카는 우연히 기억을 잃고 깨어났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멜론처럼 기괴하게 보이는 증세를 겪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격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는 술집에서 료코라는 여성과 만나 그럭저럭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우연히 찾아간 가게에서 미타라이라는 점성술사와 친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던 중 이시오카는 료코가 쓰는 서랍 속에서 우연히 자신이 잃어버렸던 면허증을 발견하게 되고, 이 사실을 추궁하자 료코는 괴로워하며 점점 변해간다. 결국 이시오카는 면허증에 적힌 자신의 주소로 찾아가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비극과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미타라이가 그런 이시오카를 돕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는 줄거리.
. 수수께끼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스릴러에 가까운 소설이다. 약간 신파적인 부분도 있고, 앞부분에 복선이 너무 눈에 띄게 드러나 있는 점도 있어서 미타라이가 등장하는 '점성술 살인사건'이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같은 소설에 비해서는 트릭으로는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대신 영화를 보는 것처럼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무엇보다도 열정이라고 해야할지, 아직 데뷔하기 전이었던 젊은 시마다 소지의 패기가 가득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다보니 시마다 소지를 처음 접하거나 미타라이 시리즈를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에겐 그닥 권하고 싶지 않지만, 다른 작품들을 통해 미타라이와 이시오카 콤비를 접한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작품에선 적당히 느긋하고 사람 좋게 왓슨 역할을 맡는 이시오카가 보여주는 격정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이나, 추리를 제외하고는 매사에 의욕 없는 조울증 탐정 미타라이가 친구를 위해 한밤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은, 시리즈의 팬들에겐 더없이 좋은 서비스컷일테니까. :)
. 실제 이 소설이 시마다 소지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쓰여졌고 작중의 시간으로도 가장 앞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마다 소지는 이 소설을 9년 동안이나 묵혀놓고 그 사이에 점성술 살인사건 등 다른 미타라이 시리즈들을 먼저 발표했다. 점성술 살인사건 등으로 미타라이와 이시오카 콤비를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고정팬들이 생겼을 때 '독자에게 선물로 주는 미타라이-이시오카 콤비의 특별 한정(....) 번외편! 이시오카의 숨겨진 진면목!!' 식으로 홍보하는 게 훨씬 좋긴 하겠지만,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해본다면 완성된 글을 9년 동안이나 묵혀놓은 채로 다시 창작의 고통을 견뎌냈던 시마다 소지가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