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 우타노 쇼고(문학동네) ●●●●●●●●○○
탐정소설 애호가인 저는 어떠한 꿈을 좇으면 될까요?
동서고금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거나, 별 다섯 개로 순위를 매기거나, 트릭을 데이터베이스화하거나 할까요? 쇼하쿠칸 서점판 '도구라 마구라' 초판본이나 '혼진 살인사건' 첫 회 원고가 게제된 <호세키> 창간호를 책장에 고이 모셔두면 될까요? 아니면 런던 채링크로스 로드의 고서점에서 딕슨 카의 미발표 원고를 발굴해서 이 나라에서 번역 출판하도록 힘을 쏟을까요? 아니면 에도가와 란포 상을 꿈꾸며, 공부나 생업을 하는 틈틈이 원고지를 마주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요?
- p. 218.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
.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라는 건 다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도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단순히 추리소설을 읽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다행히(?) '책은 내용만 읽으면 된 거 아닌가'하고 생각하다보니 초판본이나 희귀본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걸 빼면 실제 이런저런 책을 읽기도 했고, 여기저기 감상을 끄적이면서 별점을 주고 있기도 하고, 한 때는 추리소설의 트릭들을 정리해서 필요할 때마다(?!) 쏙쏙 뽑아내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도 했었다. 우타노 쇼고 역시도 추리소설에 푹 빠져 있던 시절에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거고, 그 결과 '공부나 생업을 하는 틈틈이 원고지를 마주한 끝에' 작가가 된 것이겠지. 하지만 그는 작가 이전에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을 통해 전혀 다른 꿈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진짜 '꿈'이라고 할만큼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을.
. 일단 전체적인 소개로 돌아와서. 소설은 세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사이비 종교에 심취되어 테러를 저지르고 교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섬에 갇힌(자연스레 옴진리교 이야기가 떠오른다) 네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생존자, 1명'이 세 편의 이야기 중에서 압도적으로 재미있었다. 취향상 지도가 필요한 추리물보다는 글 자체로 승부를 거는 쪽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기약도 없이 섬에 완전히 고립된 상황 속에서 서서히 깔려나가는 섬뜩한 분위기도 좋았다. 이야기가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는 섬의 이야기와 같은 시기의 신문기사가 나란히 나오는데, 신문기사와 내용을 비교해가며 읽다보면 두 이야기가 겹치며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이 들어 정신없이 몰입하게 된다. 물론 우타노 쇼고가 쓰는 이야기이니만큼 쉽게 믿었다가는 여지없이 걸리게 될만한 마지막 함정도 마련되어 있기에 읽고 나서는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아. 그랬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빠르고 섬뜩한 분위기와 잘 준비된 복선, 억지스럽지 않은 반전이 어우러진, 손꼽을만하다고 생각하는 명작.
. 나머지 두 편은 추리나 트릭은 평이한 수준이지만, 이를 통해 던지는 작가의 메시지가 좋았다. 표제작이자 첫 이야기인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생활고에 시달리는 명탐정과 조수의 이야기다. 사실 홈즈나 포와로처럼 부와 명성을 고루 얻는 명탐정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존재하기가 어렵다. 한국의 탐정은 그냥 불법과 편법 사이를 줄타기하는 흥신소 직원일 뿐이고, 사립탐정이 폭넓게 허용된 미국에서도 절대 다수의 탐정들은 이혼소송과 실종사건을 찾아 헤맬 뿐이다. 그렇다보니 판타지가 아닌 이상 소설 속의 탐정들 역시 경찰이 개입하지 않을 만한 사소한 사건에 휘말려 탐정 역할을 떠맡게 되거나, 흥신소 간판을 내걸고 주변 사람들의 귀찮은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하다가 사건에 휘말리는 식을 수밖에 없다. 우타노 쇼고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고전 추리소설의 명탐정을 동경해 그들을 흉내내다 개인정보 유출과 명예훼손으로 줄소송을 당해 빚쟁이로 전락하고 그 스트레스로 대머리까지(!!) 된 '진정한 명탐정'의 씁쓸한 이야기를 코믹스럽고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 그러면서도 마지막 소설인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추리소설의 팬들을 위해 훈훈한 무대를 준비해놓고 있다. 앞선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처럼, 그리고 다른 현실적인 추리소설처럼 이제 일반인들에게 추리는 그저 책이나 퀴즈를 읽고 즐기는 - 가상을 배경으로 즐기는 취미생활일 뿐이지만, 사실 우리가 바라고 있었던 건 정말 명탐정들처럼 추리력을 발휘해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트릭이 있는 추리소설을 찾아 읽고, 추리퀴즈를 내고 그걸 맞추는 것일테고. 우타노 쇼고는 독자들의 - 그리고 자신의 이런 꿈을 그저 헛된 것으로 접어두지 않는다. 꿈은 꿈일 뿐이고, 현실은 전혀 다르며, 추리소설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부자연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단편에서 그는 '합법적으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래서 이야기를 읽고 나면 그 터무니없는 꿈과 스케일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짠하다고 해야할지, 훈훈하다고 해야할지 - 마음에 와닿는 그런 부분이 있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추리소설의 팬이라면 꼭 직접 읽어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