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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ㅂ ㅏ ㄹ ㅐ ㅁ Nov 29. 2023

하(필, 사)랑한 여자

100일 동안 꾸준히 뭔가를 하면 내 삶이 달라질 것 같았다.


나는 100일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특출 나게 잘하는 건 없는데...


이왕이면 좋아하는 것을 택하라 한다.

좋아하는 거라...

눈알을 굴리다 언뜻 스치길 "나는 책을 좋아는 하는데..."

좋아는 하는데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래 책을 읽어야겠다! 그런데 매일매일 읽고 기록할 수 있나?"


다시 한번 눈알을 굴리다 생각이 멈췄다.


"필사!"

이래 봬도 나름 학창 시절 학급일지를 기록하던 서기를 도맡아 했다.


"따라 쓰는 것쯤이야 껌이지!"

그렇게 택한 100일 미션은 필사가 되었다.


100일 동안 곰과 호랑이가 마늘 먹는 심정으로 임했다.

가차 없이 X 표시가 있는 날들도 있었지만 100이라는 숫자에 이르고 싶었다.

시댁에 가서도 잠들기 전에 틈틈이 필사를 했고, 글을 올렸다. 김장하던 날은 딸이 대신해서 필사를 해주곤 했다.


"필사는 어떻게 하는 걸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 정보를 찾는 것보다 일단 내 마음이 머물렀던 글을 옮겨 적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에 무작정 '필사'(밑줄을 옮기는 작업)는 시작되었다.





필사를 통해 집에 있는 책들이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오래된 밑줄 위에 놓였던 글들에 답하고 싶은 마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책들은 밑줄이 너무 많아 책을 통째로 옮겨 적어야 할 것 같아 팔이 먼저 후덜 거리 곤 했다. 그 정도의 책이라면 또 외면할 수 없잖나.


필사를 하고 블로그에 기록하며 글을 세 번 접하게 되었다. 읽고, 밑줄을 긋고, 옮겨 적으며! 그곳에 작지만  [ 나 다 운 이 야 기 ]를 수줍게 얹어두었다. 글이 너무 거대한 날에는 내 글이 섞이지 않아 맴돌다 이내 아무것도 못 적는 날도 많았다.


필사는 대체로 '따듯함'과 '위안'에 치중되었다. 내가 힘들었을 시기에 듣고 싶었던 말이나 글들이 주를 이뤘다. 나는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메시지를 당당하게 외칠 자신이 없었다. 단지 작가들의 글을 빌려 작게 마음을 더할 뿐이었다.


한때 추웠고, 언제고 다시 추울 수 있는 똑같은 존재로써 그 시절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전하고 싶었다.

교만하지 않게 말이다. 교만하지 않으려 오만했지만.




[ 나다운 필사 내 멋대로 방식 ]


1. 좋아하는 책을 고른다. 



2. 읽으면서 덜컥 내려앉는 구절이나 마음 쓰이는 글귀에 밑줄 긋는다. (밑줄 긋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밑줄 긋고 마음을 붙이는 재미를 알면 헤어날 수 없다.)



3. 노트에 옮겨 적는다. 

( 스프링 노트가 쫙 펼쳐져 쓰기 편했다.)


4. 시 필사는 줄이 없는 노트를 준비하면 훨씬 멋스러운 필사 노트가 된다.



5. 필사 후 마음이 머물렀던 이유를 떠올려 글을 더해본다. 

(이게 커피보다 쓴 글을 써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만들어냈다)



6. 한 책을 필사하다 보면 반복적인 느낌이 들어 싫증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과감히 마음 편한 책을 펼쳐든다. (그럴 때면 주로 시집을 펼쳤다.)



7. 처음 시작할 때는 필사 모임이나, SNS에 올린다. 

(습관화될 때까지 타인의 시선을 이용한다)


'필사 전문 방법' 들이 있을 테지만 필사 4년 차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자신이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면 그 무엇이든 OK! 

'필사'에 실패는 없다.





필사를 하며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칭찬도 해주시고 조언도 해주시는 분들. 같은 책과 같은 밑줄에서 반가움을 표현해 주신 분들. 필사를 하고 싶으시나 엄두가 안 나신다는 분들. 전문가가 아님에도 꾸준히 하는 모습에 '칭찬'을 받으니 좋았다. 잠겨있던 이상들이 모래시계를 흔들어 놓은 듯 일어나 설레게 했다. 그리고 작은 도전을 하고 싶어졌다.


필사를 통해 다시 책을 들었고 펼쳤고 밑줄을 그었고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에겐 가끔 '명분'이 필요하다.


어느 문 앞에서 문고리를 밀고 들어가기 어려운 순간, 앞서 문 열고 들어간 이가 문을 잡아주며 미소 지을 때 눈 딱 감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게 어떨까?


그게 어떤 것이든_

연말이니까_

이제 곧 새해니까_

그 어떤 이유라도 자신을 낯선 곳으로 밀어보면 어떨까_


그렇게 필사를 함께할 사람을 모집했다.


'나다운 필사 모임'


3년간 함께하고 있다. 모임을 끌고 나가는 게 서툴러 부담스러웠던 순간, 이분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한번 해체했다.

하지만 책으로 나눈 그 감정을 어디서나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고서 다시 모였다.


무인 카페 같은 무인 필사방

답 없는 메시지에 마음 쓰이지 않는

부럽기보다 자극이 되는

미지근하다가도 책 이야기에 금세 뜨거워지는

깜빡이 없이 끼어들어도 클락션 울리지 않는

언제고 뜨거울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필사방이고 싶은 마음


,

랑하게 된 게 필사다.


하필, 너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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