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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의 조건

by baraem

온몸이 돌덩이처럼 가라앉는 기분으로 깨났다.

무거워진 몸뚱이보다 조여 오는 두통에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제대로 체한 모양이다.

손을 따고 한차례 토하고 나서도 기운을 낼 수 없었지만 눈 감은 채 누워서도 투닥거리는 남매의 소리와 실눈이 떠질 때면 보이는 집안의 난장판에 마냥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두통약을 몇 개 먹고 몸을 일으켜 저녁 준비를 하고 착 가라앉았던 집안 분위기를 데워 올렸다. 집에 누가 아프면 잠시 동안은 걱정과 도움으로 돌아가지만 오래지 않아 내가 해왔던 자잘한 일들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두통이 줄었어도 몸은 드라마틱하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이 탓을 해보지만 어쩐지 핑계 같아 운동, 식단을 조절하지 않았던 게으른 일상을 되돌아본다.




잠들기 전 남편이 퀭해진 얼굴로 다가온다.

"나도 체한 것 같아..."




복수혈전도 아니고 하루 누웠다 일어난 나에게 왜 이러는 것인가... 하물며 그는 체할만한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장염은 아닐까 오만가지 원인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지만 그는 저녁에 먹은 고기 한 덩이를 의심했다.

의심은 딱 들어맞아 남편은 밤에 몇 차례 토해댔다.




다음날

흘러내린 얼굴로 그는 앓는 소리를 하며 갖은 챙김을 요구했다.

"으~ 추워~ 이불 좀..., 내 배 소리 좀 들어봐~, 손 좀 잡아줘..."




그리고 알게 됐다.




누군가를 간호할 때의 나는 간호하는 스스로를 더 애틋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알아서 챙기려는 것에 더 요구하거나 잦은 수정을 하면 마음이 삐딱해지더라는 것이다.

이 마음을 역으로 하자면 아플 때 오롯이 그 고통을 표현하는 자유란 혼자일 때 가능하다는 거다. 아프면서도 주변을 생각하려는 마음에 최소한의 것을 부탁하고, 곁을 지켜주는 이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긴 병에 효자, 효녀 없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긴 앓는 소리는 결국 익숙한 생활 소음처럼 자리 잡고 이내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




아프다는 건 치사하다.

내가 아플 때 당신은 어땠는지 비교하고 서운해한다. 내가 아파보니 소중함을 알겠느냐 물으며 쓸모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마저도 결국 해결되는 모습을 보면 누워있는 몸뚱이는 짐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누워있을 거면 안에 들어가 누워있어.'




체하거나 심한 몸살만으로도 간호의 무게는 크다.

누워있는 마음의 부채 역시 크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아플 때, 내가 제일 아프더라는 사실이다.



하루 사이로 체하면서 남편과 나는 '병'을 앓고, 간호해야 하는 마음의 변화들을 이야기하면서 억울하면 '아프지 말자'로 서서히 체기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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