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잘못되었다.
흔히 응급실 간호사라고 하면 간호사들 사이에서 평균적으로 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병원에 굉장히 많은 부서들이 있지만 가장 응급 상황이 많이 일어나는 공간이고, 당연히 응급실이니, 그만큼 급박하게 돌아가며 내원하는 환자의 수도 많기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가 이마저만이 아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화를 가지고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환경 속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화가 많아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스스로 굉장히 화가 많아졌다고 느낀다. 남이 보았을 때 민망할 수도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화를 낸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 그런 부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날 그런 일이 발생했다.
이제 막 만 2년 가까이 되던 밤 근무 중이었던가, 그날 나는 경증 환자 구역과 입원대기 환자 구역 사이의 서포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응급실은 대게는 '24시간'내내 바쁜 편이지만 아무래도 밤에는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잠시 소강상태가 되곤 한다. 물론 그런 부분을 비집고 들어서는 몇 인분을 하는 어려운 환자들이 내원하고는 하지만 그 마저도 그렇게 부담이 되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도 평소와도 같은 그런 날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여유롭게 입원대기 구역 환자의 다 들어간 약을 떼어주고 돌아와 앉았다. 하지만 사건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평화롭게 이어가고 있던 경증 구역에 갑작스럽게 환자 3-4명이 한 번에 내원했다. 응급실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을 꼽으라면, 중한 환자가 찾아오는 것 보다도 한 번에 여러 환자가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그렇게 찾아온 환자와 보호자 대응하고 있던 찰나, 아까 약을 떼 주었던 입원대기 구역 환자의 보호자가 나에게 찾아왔다. '혹시 약은..'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질문이었고, 나는 급한 상황 속에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 어떤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아, 약은 그냥 기다리시면 저희가 알아서 드립니다.'라는 AI와도 같은 마치 예약되어 있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다시 하던 일을 하려던 찰나에, '아뇨, 그게 아닌데요.'라는 보호자의 말이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실제로 내가 생각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목적의 문의를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또 아무렇지 않게 그 문의에 대한 응대를 하였고 다시 내가 하고 있던 일에 몰입하였다. 그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약 받으러 왔는데요.'라는 말과 함께 아까 그 보호자가 나에게 무언가를 들고 찾아왔다. 퇴실 약이 하나 있던 것을 기억하고 확인을 한 뒤에 약을 건네주었지만 그 보호자는 왜인지 가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지고 온 그 무언가를 건네주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을 건네 왔다. 보통 이름을 물어보는 데에는 두 가지 정도의 경우가 있다. 첫째로는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둘째로는 너무 불만인지라.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당연히 말투와 표정을 보면 쉽게 구분이 간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너무 아무 생각 없이 행하고 말했던 지라 갑자기 왜 이름을 물어볼까 하는 생각에 '이름은 왜 그러시죠?'라는 질문을 하였고, '아, 문의를 좀 할 것이 있어서요.'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나중에 이 상황은 고객 불만사항으로 접수가 되었고 난 그 건으로 부서장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보호자가 건네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일전에 떼었던 다 들어간 약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것을 침상에 그대로 두고 왔었나 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보호자는 나에게 그것과는 별개로 문의할 것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지만, 그 보호자가 느끼기에 나의 언행은 친절하지 못했고 침상에 두고 간 그 약과 함께 나라는 간호사에 대한 이미지가 구축되었을 것이다. 일면식도 없었던 나였기에 나는 전혀 나의 태도에 관해서 신경 쓰지 못했었고, 그 보호자에게 나 스스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범주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스스로 선을 그어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전형적으로 난 그 보호자에게 '기분이 태도가 된' 간호사로 비쳤을 것이며 그렇기에 나의 이름을 물어보게 된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꽤나 충격이 컸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 되었지?'라는 생각과 함께, 아무리 내가 화가 많아졌다고 해도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선에 한해서 화를 낸다고 생각했었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갔다. 일을 시작하기 전 난 여러 사람들에게 나름 긍정적이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는데, 나의 실상은 달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우스갯소리로 '일단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야 일하기 편하다니까요.'라고 말을 했던 내가 정말 너무나도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고, 나도 모르게 그런 나의 농담이 나라는 사람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 같아 충격에서 한동안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날을 기점으로 한 4-5일 정도는 꽤나 황당한 상태로 일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다시 벗어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던 것 같다. 입사 이후로 왜 환자 보호자들은 간호사를 이해하지 못할까라는 수준의 불만 가득한 고민만을 이어갔던 것 같은데, 처음으로 나 스스로를 정말 진지하게 되돌아보았던 것 같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생각보다 말을 거칠게 하는 동료 간호사들이 더러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아마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답은 이미 내가 알고 있고 굉장히 간단하구나 하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위의 일은 어딘가 굉장히 큰 부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내가 간호사가 아니었더라도,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을 지라도 생겼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나와 환자 보호자의 관계를 간호사와 환자, 보호자라는 타이틀 안에서만 구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하고 있는 역할이 다를 뿐인데, 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해 그 환자와 보호자도 병원에 오기 전에 이미 한 인격체임을 간과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이후로 난 그저 내 일을 좀 더 열심히 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칭찬글을 받기도 하였고, 친절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 전과는 스스로가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특별히 한 것은 없다. 경험을 했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다시 일을 했다.
난 여전히 지금도, 일을 하다 보면 화가 날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화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알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끊임없이 고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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