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고 이 일이 쉬울쏘냐
이 바닥은 베테랑의 역할이 그 어느 분야보다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응급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루하루, 매년의 경험들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그렇기에 신규 간호사나 저년차 간호사들로서는 고년차, 선임 간호사들에게 매우 의지 할 수밖에 없고 그 모습을 동경하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누구라고 이 일이 쉬울쏘냐. 20년, 30년이 된 그들도 다 지금의 우리와 같은 과정을 거쳐 지금 그 자리에 있게 되었다. 어느 곳이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오늘 30년 차 선생님과 함께 일을 하면서 시간이 남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산이 아예 없었을 적 의사들의 처방을 하나하나 전부 종이로 써 내려가며 일하던 때의 이야기들, 그 당시와 지금의 간호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 차이.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그 당시 의료계 일은 낭만이 있었지.'라는 표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낭만의 의미가 맞을까 싶어 어떤 의미인지를 여쭤보았었는데, '이 직업이 정말 참 힘든 직업인 건 지금이나 그때에나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는 더더욱 우리나라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정말 희생정신으로 일을 했었으니까.'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희생정신이라. 아마 그 희생정신이라는 건 지금의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 가지고 있는 희생정신과는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의 우리가 무조건적인 희생정신으로 이 일을 하기에는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각박해졌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하고서 첫 해에 나는 간호사는 '희생적인 직업'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의 발전 없이 그저 참으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제자리걸음만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무언가 '지금의 너네가 이 바닥을 바꾸어야만 한다.'라는 사명감까지 쥐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에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는 환자의 처치만 해도 허덕이는 나에게 이 바닥을 바꾸라니, 역설이었다. 내 뒤로 들어오는 후임들에게도 간호사가 그런 직업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으로 오히려 이 바닥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바뀌긴 바뀌어야 하는데 우선 바뀌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직업에 대한 나의 직업관을 말이다.
나라고 사직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수 없이도 많이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직업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직업으로 취업을 할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이 직업이 주는 분명한 참을 수 없는 자극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간호사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알 수 있는 것들,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의료인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응급 처치를 할 자격을 가질 수 있고, 내가 의료인이기 때문에 내 가족이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할지 병원에 가서 어떤 검사를 해야 할 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중 응급실 간호사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서 마치 신에게 다가가기 전의 문 앞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과 신 사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분명 거기서 느낄 수 있는 쾌락이 있으며, 물론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도 있다. 살면서 이런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직업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4일에 한 번은 그만둠을 생각한다. 하지만 또한, 이런 생각과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게 된 나라는 사람을 만든 것도 이 직업이라고 생각하며 내일도, 그다음 날도 출근에 임한다. 오늘 또 느낄 쾌락과 욕망과 분노의 굴레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