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진짜 견문을 넓혀 주는 세계출장기행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01

by chill십구년생guy


저녁에 시간 되시면 저번에 말씀드렸던 건에 대해 이야기 좀 나눌까요?
곧 비행기 타고 들어가니까 코리아타운에서 소주 한잔 어때요?



대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캠퍼스는 어김없이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온 이들의 무용담으로 들썩였다.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으며 겪었다는 그들의 모험담은, 내게 마치 다른 차원의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구글 맵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종이 지도와 두툼한 여행책자를 나침반 삼아 낯선 길을 헤맸다는 이야기는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당시의 나는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 땅조차 밟아본 적 없는 ‘육지 토박이’였다. 내게 영어란 그저 수능 점수를 따기 위한 암기 과목에 불과했다. 길에서 우연히 외국인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말문이 막혀 얼어붙기 일쑤였고, ‘해외’라는 단어는 늘 TV 화면 속에나 존재하는, 나와는 지극히 거리가 먼 평행우주 속 이야기였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상상조차 못 했던 반전이 일어났다. 지금 나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IT 스타트업의 공동 창업자이자 글로벌 사업 이사(CBO)로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태국 방콕에 지사를 설립하고 현지 팀을 이끌며, 1년 중 3분의 1 이상을 낯선 타국의 공기 속에서 보냈다. 차곡차곡 쌓인 항공 마일리지로 매년 가족들과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고, 페이스북 메시지부터 왓츠앱까지 온갖 채널로 외국인 파트너들과 일상을 공유한다. 이제는 자주 찾는 도시마다 “Long time no see!”라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단골 가게들도 여럿 생겼다.


과거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삶이, 이제는 나의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제주도도 못가봤던 내가 해외 지사를 세우고 인터뷰를 하게 되다니 (오른쪽이 나)



시작부터 조금 과시적으로 느껴졌다면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고 싶다. 정보가 비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이렇게라도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지 않으면 금세 묻혀버릴지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물론 글쓰기라는 행위가 본질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내밀한 기록이지만, 기왕 세상 밖으로 꺼내놓은 이야기가 더 많은 이들에게 닿아 작은 영감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모쪼록 이해해주길 바란다.



여행을 하면 정말 견문이 넓어질까



“젊을 때 여행을 많이 다녀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격언이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경험이 자연스레 견문을 넓혀줄 것이라는 믿음은 수많은 청춘을 무리해서라도 해외로 떠나게 만든다. 낯선 풍경과 문화를 마주하다 보면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얻었다는 충만함이 차오르고, 통장 잔고를 털어 쓴 죄책감마저 기분 좋은 여운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지곤 한다.


여행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독한 여행 예찬론자다. 일부 경제 유튜버들처럼 “요즘 세대의 여행은 견문 넓히기가 아니라 사치 섞인 소비일 뿐”이라며 혀를 찰 생각은 더더욱 없다. 여행이 주는 휴식과 즐거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라떼’ 시절의 해외여행이 일생에 몇 번 없는 비장한 이벤트였다면, 지금의 여행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취향을 즐기기 위한 자연스러운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다만, 단순히 ‘많이 다닌다’고 해서 견문이 저절로 넓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짚고 싶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견문은 보고(見), 듣는(聞) 행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그 경험을 통과하며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견인할 내면의 힘을 길러낼 때 비로소 가치가 증명된다. 같은 장소를 딛고 서 있어도 어떤 마음가짐을 품느냐에 따라 수확은 천차만별이다. 누군가에게 여행은 일시적인 기분 전환에 그치지만, 누군가에겐 인생의 궤도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한 끗은 바로 ‘의미 있는 목적의식’이다.


만약 단순히 시각과 청각의 자극만으로 견문이 넓어지는 것이라면, 굳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비행기에 오를 필요가 있을까?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풍경을 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는 유튜브의 시대에 말이다.



망해가던 회사에 비춘 한 줄기 희망



사업 2년 차였던 2017년, 친구와 함께 창업한 ‘맘모식스’는 끝없는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액션 장르에 도전하면 금방 주목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장은 이미 대기업들이 장악한 레드오션이었다. 희망을 걸었던 게임 엔진 분야조차 강호의 숨은 고수들로 가득했다.


10년 넘게 직장이라는 안락한 울타리 안에 있던 우리는, 그때 처음 세상의 냉혹함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경영은 혼란스러웠고 프로젝트 일정은 속절없이 미뤄졌다. 매출은 0원인데 자본금은 바닥을 보였다. 더 이상 영혼까지 끌어 모아 '땡길' 수 있는 대출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빚만 떠안은 채 여섯 명의 멤버들이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상황이었다.


그때 지인을 통해 ‘요즘 VR이 뜨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으며 정부와 기관의 투자가 활발하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우리에게 그것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일단 잡아야 하는 동밧줄이었다. 개발 실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빠르게 샘플을 만들어 글로벌 플랫폼 ‘스팀(Steam)’에 올렸다. 덕분에 VR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 선발되었고, 기적처럼 5천만 원의 시드 투자를 유치하며 멸종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일한 살길은 견문을 넓히는 것



투자 유치로 잠시 숨통은 트였지만, 마음속 불안감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급하게 흉내 낸 VR 기술이 과연 우리의 지속 가능한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냉정히 말해, 우리는 그저 6개월쯤 더 버틸 수 있는 '시한부 생명'을 연장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 기술이 세계 시장에서 정말 통할 수 있을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본질은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인터넷 정보와 남의 말만 믿고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처참하게 깨진 참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약 4년 동안, 나는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현장의 답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여정에는 분명한 동기가 있었고, 그 안에서 의미 있는 목표를 세우고 달성해 나갔다. 스타트업의 현장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지만, 여행을 통해 얻은 인사이트는 매 순간 중요한 변곡점이 되어주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경쟁자들보다 아주 조금, '딱 반 발짝'씩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버텨낸 시간이 층층이 쌓이면서 회사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5월, 카카오게임즈의 자회사인 넵튠으로부터 인수 제안을 받았다. 공동 창업자로서 보유한 지분을 매각하며 우리는 꿈꾸던 ‘엑싯(Exit)’에 성공했다. 비록 회사는 주인이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경영의 한 축을 담당하며 해외 지사를 세우고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는 여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망해가던 게임회사에서 4년만에 엑시트라니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는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직접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하여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몽골 제국의 통치 체계부터 상업과 교통, 종교적 관용, 그리고 막대한 부(富)에 이르기까지—그가 목격한 세계는 당시 유럽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그는 기록을 통해 유럽인들이 비로소 더 넓은 세상을 인식하고 상상하기를 바랐다.


내가 이 시리즈의 제목을 ‘여행기’가 아닌 ‘견문록’으로 정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한 여행 정보나 개인적인 소회를 넘어,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었던 결정적 사건들과 그 통찰이 비즈니스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각 여정의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가능한 한 솔직하게 써 내려가려 한다. 이 기록들이 여행을 통해 ‘의미 있는 목적지’를 찾고, 인생의 궤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영감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 그럼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다음편, ‘독일 베를린 : 의도는 미약했으나 효과는 창대하리라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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