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 의도는 미약했으나 효과는 창대하리라 1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02

by chill십구년생guy


“여보세요? 여기 S전자입니다.
저희 부스에서 컨텐츠 전시하셨다던 VR 개발사 맞으시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국내를 대표하는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이제 막 베를린 출장에서 돌아와 짐을 풀던 참이었는데, 고작 직원 여섯 명뿐인 우리 회사를 기사에서 보고 수소문해 연락했다는 것이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 하나만 걸려라'는 심정으로 뿌렸던 보도자료에 이렇게 커다란 '대어'가 덥석 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솔직히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혹시 기사에서 허락도 없이 그쪽 이름을 언급했다고 항의하려는 건가? 명예훼손이라도 운운하면 어쩌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 손에 든 휴대폰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그들은 진심으로 우리의 기술에 관심이 있었고, 논의 끝에 우리는 S전자와 정식 콘텐츠 개발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날 이후 마법 같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들이 먼저 손을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사 하나로 우리의 세상이 360도 바뀌었다



2017년 9월, 독일 베를린 출장은 단순히 세상을 구경하러 떠난 자리가 아니었다. 낯선 도시에서 기를 써가며 만들어낸 기회였고, 인지도 없는 스타트업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던진 승부수였다. 만약 그때 우리가 "준비가 안 됐다", "비용이 부담된다"는 핑계로 독일행을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맘모식스가 이뤄낸 수많은 성취는 아마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히 얻어걸린 기회의 조짐



2017년 5월, 망해가던 게임사였던 우리는 간신히 시드 투자를 유치하며 6개월의 생존 시간을 벌었다. 사업 분야를 VR로 급히 피벗(Pivot)한 덕분이었지만, 냉정히 말해 그때의 우리는 기술도 비전도 부족한 ‘흉내내기’ 수준에 불과했다. 그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젖어, 투자자가 귀띔해 준 ‘VR 테마파크’라는 트렌드에 발만 살짝 담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S전자 연구원 출신 대표님이 이끄는 하드웨어 스타트업 ‘애틱팹’을 소개받았다. 그들은 VR 기기와 연동되는 전용 체어를 만들고 있었고, 우리에게 콘텐츠 개발 협업을 제안했다. 마침 정부 지원사업 아이템이 필요했던 우리는 그 체어로 조작하는 ‘버추얼 닌자’라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본격적인 개발에 시동을 걸 무렵, 애틱팹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오는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17’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S전자의 메인 부스 안에서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S전자가 보육 스타트업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유럽 관람객들에게 직접 만든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직감적으로 촉이 왔다. 이 호재를 절대로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무리를 해서라도 직접 가야겠다



한정된 투자금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던 우리에겐 한가하게 미래를 설계할 여유가 없었다. 정부 지원사업은 둘째 치고, 당장 입에 풀칠할 방법부터 찾아야 했다. 외주 일감이라도 따보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정체 모를 신생 스타트업에게 선뜻 일을 맡기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에게 절실했던 건 화려한 기술력보다,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이름값’이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걸로 보도자료를 내야겠어!'


무명의 초짜들이 S전자의 글로벌 부스에 콘텐츠를 올렸다는 사실. 이건 잘만 포장하면 업계의 시선을 단번에 강탈할 수 있는 최고의 '노이즈 마케팅' 찬스였다. 남의 잔치에 숟가락만 슬쩍 얹는 모양새라 조금 민망할 수도 있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던 우리에게 체면 따위는 사치였다.


문제는 ‘증거’였다. 보도자료가 기사화되려면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확실한 물증, 즉 ‘사진’이 필요했다. 현장의 열기와 우리가 실제로 그 중심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생생한 장면들 말이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그래, 베를린으로 가자. 가서 제대로 된 사진 딱 한 장만 건져오자!"


그 사진 한 장으로 생계를 책임져줄 외주처들을 낚아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은 채, 그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첫 해외 출장이 잡혔다.



겨우 사진 한장 찍겠다고 왕복 40시간



일정은 시작부터 가혹했다. 시간과 예산 모두가 벼랑 끝이었던 우리는 결국 2박 4일이라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짜냈다. 심지어 베를린 도착 예정 시각은 한밤중.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뿐이었다. 24시간 안에 모든 미션을 완수해야만 하는 ‘미션 임파서블’급 여정이었다.


숙소를 구하는 것부터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계적인 전시회 기간이라 행사장 인근 숙소는 이미 전멸했거나, 남아 있는 곳은 비현실적인 가격을 부르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행사장과는 한참 떨어진 베를린 남동쪽, 노이쾰른(Neukölln) 지역의 아파트 방 한 칸을 에어비앤비로 겨우 예약했다. 동선 효율은 진작에 포기했지만, 당장 머리 뉘어 잠잘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항공편은 루프트한자를 택했다.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경로였는데, 빡빡한 일정에 맞추다 보니 왕복 비행시간만 무려 40시간에 달했다. 고작 하루 남짓한 활동을 위해 40시간을 하늘 위에서 보낸다니. ‘이게 정말 제정신인가’ 싶다가도,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인천을 출발해 프랑크푸르트 공항 벤치에 기대 쪽잠으로 밤을 지새우며, 우리는 그렇게 베를린 땅을 밟았다. 피곤함보다는 긴장감이 온몸의 감각을 깨우고 있었다.



쩔어있는 피로와는 무관하게 마냥 설레어 보이는구나



지하철 막차를 잡아타고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허기까지 몰려왔지만, 낯선 베를린의 밤거리는 적막하기만 했다. 새벽까지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의 밤 풍경이 새삼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근처에서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던 케밥 트럭을 발견해 간단히 끼니를 챙겼고, 옆 잡화점에서 맥주 한 병을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 맥주의 이름은 ‘베를리너(Berliner)’. 오직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로컬 맥주였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가벼우면서도 쌉쌀하게 감도는 뒷맛이 일품이었다. 독일에선 물 대신 맥주를 마신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의점 맥주치고는 퀄리티가 상당했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비행의 피로가 조금은 씻겨 나가는 듯했다.



에어비앤비 주인이 손글씨로 적어준 Hi, Welcome to Berlin 이 정겹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먼저 현지에 도착해 전시를 준비하던 애틱팹 대표님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VR 체어와 우리 콘텐츠 사이의 연동이 꼬여버려서, 자칫하면 내일 시연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뿔싸. 사진 한 장 건지겠다고 독일까지 날아온 이 모든 고생이 통째로 날아갈 위기였다.




다음편, '독일 베를린 : 의도는 미약했으나 효과는 창대하리라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 /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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