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 의도는 미약했으나 효과는 창대하리라 3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04

by chill십구년생guy


진짜 장난 아니지 않아요?
특히 스타워즈, 그거요!



베를린 출장 둘째 날 저녁, 애틱팹 팀과 함께 축하를 겸한 회식 자리를 가졌다. 나는 평소보다 꽤 들떠 있었다. 방금 전까지 IFA 전시장을 돌며 레노버의 미라지 AR 기기로 ‘제다이 챌린지’를 체험하고 돌아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광선검을 휘두르며 제다이가 되어보다니! 어릴 적부터 열렬한 팬이었던 스타워즈를 이토록 생생하게 마주한 순간은 그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아는 만큼 보이는게 아니라 본 만큼 안다



사실 ‘보도자료용 인증샷’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뒤였다. 그래서 큰 기대 없이 산책하듯 전시장을 돌기 시작했는데, 구경하면 할수록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VR부터 마이크로소프트의 홀로렌즈, 윈도우 혼합현실(Mixed Reality) 기기까지—말만 듣던 글로벌 기업들의 고가 장비들이 내 눈앞에 깔려 있었다. 누구나 마음껏 체험할 수 있도록 열어둔 그 기회들을 앞에 두고, 마냥 한가롭게 걷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쟁쟁한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내놓은 기술들이 한자리에 모인 광경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체험을 거듭할수록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동안 나는 VR을 그저 생존을 위해 잠시 거쳐 가는 유행쯤으로 가볍게 여겼던 것은 아닐까. ‘이건 정말 진지하게, 내 인생을 걸고 도전해 볼 만한 분야다.’ 처음으로 가슴 깊이 확신이 생겼다.



보이는 족족 정신없이 체험하고 다녔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 하루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시에 참가한 기업 중 상당수가 제품이 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출전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현장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내 가능성을 증명하고, 그 기세로 투자를 유도하는 전략이라고 했다. ‘별의별 방식이 다 있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처절한 생존 방식이 낯설지 않아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의 뜨거웠던 베를린 밤은 깊은 술자리와 함께 늦게까지 이어졌다.



술자리 사진 특, 다음날 보면 뭘 찍으려고 의도한건지 모르겠다는



다음 날 아침, 전날의 무리한 술자리가 남긴 쓰린 속을 부여잡고 거리로 나섰다. 해장이 간절했지만 너무 이른 시각이라 문을 연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다 발견한 곳은 튀르키예 식당이었다. ‘역시 형제의 나라!’ 타지에서 우리만큼 부지런한 건 튀르키예 사람들뿐이라는 사실에 반가움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섰다.


메뉴판 사진 중 국물이 자작해 보이는 요리를 무작정 주문했다. ‘이시켐베 초르바스(İşkembe Çorbası)’라는 이름의 이 요리는 우리식으로 치면 내장탕에 가까웠다. 소나 양의 내장을 푹 끓인 국물에 고춧가루와 버터가 어우러져, 간밤에 마구잡이로 섞인 맥주들이 뒤집어놓은 속을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공깃밥 대신 나온 빵을 큼직하게 찢어 국물에 말으니 제법 국밥 같은 비주얼이 나왔다. 덕분에 타국에서 완벽한 ‘해장 루틴’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것도 케밥이었는데, 이쯤 되면 내가 베를린에 온 건지 이스탄불에 온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후로 튀르키에 식당은 전 세계 어디서든 나의 해장 넘버원



근처 식료품점인 REWE에 들러 가족들에게 줄 기념품을 챙기며 틈틈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어제 현장에서 배포한 기사들이 하나둘 포털 상단을 장식하고 있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 사진의 힘은 위대했다. 텍스트만 보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게시율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좋아, 이제 정말 끝이다!’ 이번 출장에서 계획한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2박 4일의 일정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다 보니, 곧장 공항으로 떠나기엔 베를린의 공기가 못내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가장 독일다운 식사를 한 번 더 하기로 하고, 구글 평점이 높은 ‘루이스(Louis)’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슈타이너(Warsteiner) 맥주에 바삭한 슈니첼과 매콤한 굴라쉬를 곁들이며 짧았던 여정을 갈무리했다.


다시 20시간에 걸친 기나긴 비행 끝에 한국 땅을 밟았다. 무모했고, 짧았으며, 강렬했던 베를린 출장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슈니첼은 그냥 돈까스, 굴라쉬는 유사 소고기찜. 특별히 감자가 맛있더라 정도






후일담



한국에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S전자 무선사업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가 배포한 기사를 인상 깊게 보았다며, 내부에서 준비 중인 파일럿 프로젝트에 참여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저 적당한 외주처 하나만 연결되길 바라며 던진 낚싯바늘에, 기대치도 못했던 엄청난 '대어'가 걸려든 셈이었다.


이 우연한 연락은 필연이 되어, 이후 3년 동안 S전자와 파트너십을 맺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곧이어 LG 유플러스에서도 손을 내밀었고, 또 다른 새로운 인연들이 줄지어 시작되었다.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하던 우리에게 그들의 제안은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덕분에 우리는 ‘생존’이라는 원초적인 불안에서 비로소 벗어나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면의 변화였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불씨가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잘나가는 것들을 적당히 흉내 내며 버티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세계 무대에서도 당당히 통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우리만의 길을 개척해 보자는 다짐이 싹텄다. 그 작은 불씨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뜨거운 불꽃으로 커져 나갔다.


그리고 그 다짐은 머지않아, 우리를 다음 여정으로 이끄는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다음편, '일본 도쿄: 빨리 가려면 혼자, 멀리 가려면 함께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이번 주는 매일(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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