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03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저희가 어떻게든 해결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마음으로 눈을 떴다. 오직 사진 한 장 건져보겠다는 일념으로 베를린까지 기를 쓰고 날아왔는데, 정작 기계가 말썽이라 단 하루뿐인 기회가 허공으로 날아갈지도 모른다니. 밀려오는 허탈함에 눈앞이 아득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일렀고 긴장의 끈을 놓아서도 안 됐지만,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숙소 방구석에 주저앉아 연락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대기하는 시간 동안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고 텐션도 끌어올릴 겸, 가볍게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선 여독으로 멍해진 머리를 깨워줄 강력한 카페인이 절실했다.
구글 맵을 뒤져보니 차로 30분 거리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 25대 카페’ 중 하나로 꼽힌다는 ‘보난자 커피(Bonanza Coffee)’가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베를린까지 와서 이런 명소를 놓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강렬한 타이틀이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카페에 도착해 번역 앱의 힘을 빌려 메뉴 추천을 부탁하자, 바리스타는 주저 없이 ‘피콜로 라떼’를 권했다.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아주 적게 섞은 호주식 커피라고 했다. 평소 커피 향이 우유에 묻히는 게 싫어 라떼를 멀리하던 나였지만, 이건 완전히 달랐다. 우유는 그저 거들 뿐, 원두 본연의 풍미를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고소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더해져 꽤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날 이후, 피콜로 라떼는 내 취향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에서의 우연한 경험이 입맛 하나를 바꿔놓은 셈이다.
커피로 정신을 바짝 차린 뒤, 2km 남짓 떨어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해 세계 각국 예술가 118명이 그라피티로 채워 넣은 거대한 야외 갤러리다. 분단과 통일, 저항과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들이 장벽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순간에도 내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고, 몇 분 간격으로 화면을 확인하느라 장벽의 메시지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가장 유명한 작품인 ‘형제의 키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어떤 그림도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다. 몸은 역사의 현장에 있었지만, 정신은 이미 전시장 앞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애틱팹 쪽에서는 소식이 없었지만, 보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 대신 연락이 오는 즉시 전시장으로 튀어 갈 수 있도록, 행사장과 조금 더 가까운 쪽으로 이동해 식사 장소를 정했다. 선택한 곳은 프리드리히슈트라세 역 근처, 슈바인 학센(Schweinshaxen)으로 이름난 ‘슈텐디게 페르트레퉁(Ständige Vertretung)’이라는 식당이었다.
독일식 구운 돼지 족발인 학센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겉바속촉’의 정석을 보여주듯 껍질은 과자처럼 바삭했고, 속살은 촉촉한 육즙을 머금고 있었다. 짭조름한 간 덕분에 이번에도 물 대신 곁들인 맥주와의 궁합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다만 한 가지, 장소 선택에 사소한 실수가 있었다. 슈프레 강변의 정취를 만끽해보겠다며 호기롭게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는데, 주변을 장식한 생화 때문인지 벌들이 끊임없이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유럽 특유의 낭만이라며 애써 웃어넘겼지만, 결국 벌떼와의 사투에 지쳐 낭만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실내로 대피해야만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연동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우리는 곧장 지하철에 몸을 싣고 IFA 2017이 열리는 메세 베를린(Messe Berlin)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우리를 마중 나온 애틱팹 대표님의 안내를 받아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S전자 부스의 압도적인 위용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수많은 유럽 관람객이 VR 체어에 앉아 우리가 만든 '버추얼 닌자'에 몰입해 있는 풍경을 목격했다. 걱정이 무색할 만큼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작전(?)에 돌입했다. S 로고가 선명하게 노출되는 구도를 잡아 셔터를 눌렀고, 체험 중인 관람객들의 생생한 표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담아냈다. 모든 촬영은 불과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현장에서 즉시, 한국에서 미리 작성해온 보도자료 원문에 방금 찍은 따끈따끈한 사진들을 첨부해 이메일을 뿌리기 시작했다. 배포 리스트는 출국 전 국내 VR 관련 기사를 샅샅이 뒤져 기사 하단에 적힌 기자들의 이메일 주소를 하나하나 수집해둔 것이었다. 수십 개의 주소가 빼곡히 담긴 리스트가 드디어 제 역할을 하는 순간이었다.
조금 민망한 고백이지만, 사실 ‘현지에서의 폭발적인 호응’ 같은 문구는 이미 한국에서 미리 써온 것이었다. 설령 반응이 미지근하더라도 어떻게든 그럴싸한 사진을 찍어 연출해보겠다는 얄팍한 ‘플랜 B’까지 세워두었지만, 다행히 실제 반응이 워낙 좋아 억지로 포장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렇게 독일 출장의 단 하나뿐인 목적이 순식간에 달성되었다.
목표를 이루고 나니 팽팽했던 긴장이 일시에 풀렸다. 장거리 비행의 여파와 시차가 뒤섞인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애틱팹 임직원들과의 저녁 회식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 눈을 좀 붙일까 고민도 했지만, 이 먼 곳까지 와서 정작 전시회 구경 한 번 안 하고 돌아가는 건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 세계 최대 가전쇼에 도대체 어떤 대단한 것들이 나왔는지 가볍게 한 바퀴만 둘러보자.’
다음편, '독일 베를린 : 의도는 미약했으나 효과는 창대하리라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 / 금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