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 빨리 가려면 혼자, 멀리 가려면 함께 1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05

by chill십구년생guy


VR이요? 그거 다 허상이에요.
제 주변엔 쓰는 사람 한 명도 없어요.



망해가는 게임사였던 우리는 VR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시드 투자를 유치했고, 덕분에 부도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하지만 정작 내부 멤버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골수 게임 개발자’들이었다. 평생을 정통 게임 개발에만 몸담아온 이들에게 VR이란 그저 조금 특이한, 혹은 잠깐 유행하다 사라질 콘솔 게임기의 변종 같은 존재였다. 당장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경영진의 읍소에 마지못해 손을 대긴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VR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맘모 ‘식스’에서 ‘원’ 팀으로



하지만 2017년 9월, 도쿄 워크숍을 다녀온 뒤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회의 시간에는 서로 눈을 맞추며 열띤 대화가 오갔고, 개발 과정에서도 자발적인 아이디어와 피드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고스란히 결과물의 퀄리티로 드러났다. 나와 친구, 단 두 명의 경영진이 소위 ‘멱살 잡고 캐리’하며 겨우 끌고 가던 조직이 비로소 진짜 ‘원 팀(One Team)’이 된 것이다.



여기저기 얼굴이 팔려있는 나와 친구를 제외하곤 매너 모자이크



우리에게 도쿄 워크숍은 단순한 친목 여행이 아니었다. 팀의 체질이 ‘스타트업답게’ 바뀌는 결정적 시발점이었으며, 그 전통은 코로나 이후 최근까지 매년 전 직원이 함께 떠나는 해외 워크숍이라는 우리만의 독특한 복지 제도로 굳건히 이어졌다.



혼자서만 튀게 된 변화



베를린에서 돌아온 직후, 내 안에는 남다른 열의가 들끓고 있었다. 당장 회의를 소집해 개발 중이던 ‘버추얼 닌자’ 프로젝트의 판을 새로 짜고 싶었고, 머릿속에 가득 찬 아이디어들을 쏟아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멤버들의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


서로의 끓는점이 다르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당시 나와 멤버들 사이에는 딱 베를린 출장에서 내가 넓히고 온 견문만큼의 온도 차가 존재했다. 나 혼자 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두가 나처럼, 한 번쯤은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열기를 동시에 마셔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도쿄게임쇼(TGS) 2017’ 일정이었다. 바로 2주 뒤, 도쿄에서 열리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게임 전시회. 이거다 싶었다. 나는 게임쇼 참관을 메인 이벤트로 내세우고, 여기에 특별한 현장 프로그램을 곁들인 워크숍 형식을 기획해 멤버들에게 제안하기로 했다. 내 입에서 ‘도쿄게임쇼’라는 단어가 채 끝나기도 전에, 뼛속까지 게이머였던 멤버들의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강렬했다.


“좋아요. 무조건 갑시다.”


드디어 모든 것이 내 계획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 함께 도쿄로



수요일 오후, 우리는 업무를 조금 일찍 마감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시작될 도쿄게임쇼 관람을 위해 저녁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현장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입장권은 이미 한국에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도쿄게임쇼는 보통 4일간 개최된다. 평일 이틀은 업계 종사자와 매체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비즈니스 데이’, 주말 이틀은 일반 관람객에게 개방되는 ‘퍼블릭 데이’로 운영된다. 우리는 팀의 견문을 넓히기 위한 ‘워크숍’이라는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인파에 치이지 않고 보다 밀도 있게 전시를 살펴보기 위해 비즈니스 데이 티켓을 선택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나리타 공항을 다함께 졸졸졸



일본 저가 항공의 대명사인 피치항공을 타고 나리타 공항에 내려, 리무진 버스로 신오쿠보의 숙소까지 이동했다. 여섯 명의 멤버가 한 공간에서 팀워크를 다질 수 있도록 돈키호테 바로 옆에 위치한 에어비앤비 맨션을 통째로 빌렸다. 짐을 풀고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히 허기를 달랜 뒤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내일 하루에 모든 핵심 일정을 몰아넣은 탓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았다. 하나둘 눈을 뜨는 대로 외출 준비를 마치는 멤버들의 얼굴에는 게임쇼를 향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번 워크숍의 제안자이자 인솔자를 자처한 나는 앞장서서 신주쿠 방향으로 멤버들을 이끌었다.


아침 메뉴는 라멘으로 정했다. 기왕 도쿄까지 왔으니 일본 특유의 진득한 국물 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아저씨들에게 국밥이 있다면, 일본에는 라멘이 있는 법. 묵직한 국물 한 그릇이면 이 긴 하루를 버텨낼 에너지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향한 곳은 가부키초의 해장 명소로 알려진 라멘 체인점 ‘준도야(ずんどう屋)’. 검증된 맛집이라는 자신감을 안고 자리를 잡은 뒤, 기운차게 돈코츠 라멘을 하나씩 주문했다.



기세 좋게 시작한 아침이었지만 호응면에선 대참패



하지만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건강을 생각해서 슴슴한 맛을 찾기 시작한 ‘아저씨’ 개발자들에게 일본 현지 라멘 특유의 강렬한 염도는 다소 버거운 도전이었다는 사실을. 국물을 한입 들이키자마자 여기저기서 짜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에라이, 그냥 호불호 없는 이치란이나 갈걸….”


민망함에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당황해하는 멤버들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첫 코스는 바로



식사를 마치고 가부키초 시네시티 광장 앞에 멈춰 서자, 멤버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도쿄게임쇼가 열리는 마쿠하리 멧세와는 거리가 먼 이곳에서 왜 발걸음을 멈추는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광장 옆에 거대하게 자리 잡은 건물을 가리켰다.



아직 토요코 키즈들이 없을 무렵의 가부키초 시네시티 광장



“자, 다들 주목! 이번 워크숍의 첫 공식 일정은 바로 여깁니다, ‘VR ZONE Shinjuku’!”


멤버들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그들의 머릿속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동시에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일본 도쿄 : 빨리 가려면 혼자, 멀리 가려면 함께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이번 주는 매일(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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