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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또 Oct 30. 2020

생애 첫 출국부터 공항 미아라니

나름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렇다 해서 타 전공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님을 밝히고 시작한다. 


어쨌든 안타깝게도 진짜 영어 한마디 못했기 때문에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기 전에 어학연수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호주에서 공부하는 게 아무래도 좋겠지만 퇴사하고 지출에 소심 해지다 보니 비교적 저렴한 필리핀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중에 어학원을 결정하는데 크게 기인한 것이 바로 날씨였다. 필리핀의 습한 기후 때문에 에어컨이 필수인데 대부분 개인이 사용한 전력량만큼의 전기세를 추가로 지불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턱대고 에어컨을 사용하다 전기세 폭탄을 맞았다는 경험담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비록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었어도 이왕이면 이런 사소한 것도 신경 쓰지 않도록 필리핀 쪽에서도 그나마 제일 시원한 여름의 수도라 불리는 바기오로 향하게 되었다.


드디어 출국 날, 인천 공항에 처음 간 나는 너무 설렜었지만 우습게도 처음인 척하지 않으려고 겉으로는 태연하고 익숙한 척하기도 했다. 현재 더 모순적인 건 몇 번을 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항에 가면 처음보다

더 두리번거리며 어리바리 해지는 것 같다. 그만큼 공항은 항상 여행 간다는 두근거림 때문에 애처럼 만드는 신비로운 곳인 것 같다.


마닐라 공항에 내리자마자 필리핀의 습한 날씨와 그 답답한 공항 내음은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뭔가 순조로울 것 같지 않은 촉. 원래는 마닐라공항에 내리면 입학 예정이었던 학원 담당자가 직접 마중을 나오기로 했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나를 찾는 팻말이 없었다. 안내문을 아무리 확인해도 분명 여기 만남의 장소에서 누군가가 날 맞이해야 했다. 조금 늦는 건가 싶어 기다렸지만, 입국장에서는 서로 지인을 만나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점점 텅텅 비는 주변을 보니 아무래도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겐 이런 일 쯤이야 대수롭지 않을 수 있겠지만 왜 하필 타국에 첫 발은 내디딘 지금이며, 말 한마디도 못하는데 어쩔 줄 모르는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당혹스러웠다.


이 일정을 제대로 확인해주지 않은 관계자들에게 원망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 시간 거리면 혼자 어떻게든 택시라도 타서 갈 수 있을 텐데 마닐라에서 바기오는 차로 6시간은 북쪽으로 가야 하는 먼 곳이라 엄두도 나지 않았고 무작정 이대로 하염없이 기다리면 되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그때는 심지어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있지 않아 거의 2G였기 때문에 와이파이를 통한 보이스톡으로 연락할 수도 없었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일단 먼저 연결이 돼야 할 거 같았고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손

짓 발짓 단어를 나열해가면서 겨우 폰을 빌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서바이벌 영어 아니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아, 진짜 왜 꼭 급할 때 전화를 한 번에 받지도 않는 걸까?


속이 까맣게 타다 재가 되기 직전에 겨우 바기오 현지 담당자와 연결이 되었다. 역시 예상대로 이 양반들은 내가 지금 이 시간에 도착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대부분 새벽 비행기로 오다 보니 나도 당연히 그런 줄 알고 픽업 매니저가 아직 출발도 안 한 상황이라고.


보통 필리핀의 어학연수는 같은 날짜에 입학하는 사람들끼리 기수 가정해지는 베치 메이트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퇴사 후에 바로 가는 이 유로 개인적인 일정에 맞췄기 때문에 정규 입학 스케줄과 달라 아무래도 헷갈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매니저가 출발해도 6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고 그런다 한들 그동안 나는 어디에서 대기를 타란 말인가. 호기롭게 내가 그냥 버스 타고 가겠다고 하니 마닐라는 여자 혼자 짐 들고 다니기엔 아직 위험하다고 했다. 그럼 택시를 타겠다고 하니 그것 또한 납치(?) 위험성이 있어서 안된다 했다. 마닐라가 그렇게 위험했던 곳이었나? 그런데도 더블 체크하지 않다니..


왈가왈부 끝에, 결국은 대중교통이 안전하다 판단했는지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 줄 현지 교민 부부가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 공항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

.

.

처음부터 이게 뭔 일인지... 능숙하게 대처하기엔 내공이 많이 부족했다.

.

.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그 부부를 만났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갑자기 수다스러워졌고 밝고 크게 웃는 호탕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많이 놀랐을 텐데 아주 긍정적이라며 해외 생활을 정말 잘하겠다고 거듭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분명 굉장히 낯을 많이 가리고 말도 잘 안 하는 성격이었는데 말이다. 정말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였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너무 떨다 보니 내면의 또 다른 내가 나오는 건 처음 알았다.


외국에서 처음으로 먹은 음식인 졸리비의 스파게티를 먹고 나서 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탔다. 약 6시간을 넘게 달려가는데 정말이지 그때를 생각하면 와이파이 없는 그 순간은 무료함도 무료함이지만 불안한 시

간이었다.


통화가 되는 핸드폰도 없고 버스터미널에 내리면 그들이 이번에는 정말 와줄지 걱정이 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밤 11시가 넘어 자정을 향할 때쯤 도착을 했고 다행히 그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원장과 학원 관계자들은 너무 죄송하다며 오는데 고생했다고 연신 사과를 하였다.


원장이 미안함의 의미로 현지에서 내야 하는 SSP 비자(SPECIALSTUDY PERMIT)와 비자 연장 비용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 돈이 대략 20만 원 돈이었다. 여기에 오면서 썼을 사비도 정산하여 통 크게 5천

페소(10만 원 정도)를 주었다. 나는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감사했기 때문에 보상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이런 혜택이 주어져서 아까 느낀 일말의 원망 감도 없어져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숙소에 들어왔다. 시작부터 험난한 여정을 씻어버리고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 낯선 밤공기에 비로소 내가 필리핀 바기오라는 곳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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