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아주 많이 오더라고. 하루 계획이 눈에 묻혀 버렸어. 나는 추움을 좀 뛰어다니면서 운동도 하고, 공놀이도 하려 했는데, 약속 다 취소됐어. 헬스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모자가 없어서 좀 빨리 걷는데, 정수리가 시리더라고. 머리 위에 눈이 쌓였더라. 웃겨서 사진도 찍었어. 그만큼 눈이 많이 왔어. 펑펑 내려서 있잖아, 자꾸 눈에 거슬리고, 마음이 울컥하는 거야. 사람들이 막 좋아하더라고. 하양 위에 발자국 찍으면서 웃더라고. 나는 눈에 눈이 들어갈 것 같아서 되게 빨리 걸었어. 아무도 안 보려고 노력했는데, 자꾸 보이더라. 몰라. 가끔씩 마음이 힘든 것 같아.
왜 아무도 안 보려고 했냐면, 터벅터벅 걷는 너 걸음걸이 있잖아. 비슷한 모습이 언뜻 비칠 때마다 그 한걸음이 심장에 무척 내리 꽂히더라고. 너는 모르겠지만. 터벅 한 걸음에 둥둥거리면, 두 걸음에는 터질 듯 차오르고, 세 걸음에는 끝내 죽었는지 고요해지는 심장 말이야. 아니면 못 끝낸 사랑이든가. 아니면 실핏줄로 간신히 뻗어 살아남으면서 본인이 꼭 가여운 줄 아는 미련이든가. 너는 덕지덕지 감싼 미련의 줄기들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찢어발기는지 모를 것이고, 조금씩 나동그라진 우리의 미련들은 왜 나를 놓아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지. 나의 미련이 맞겠구나. 터벅터벅이든 어쨌든 너 걷는 모양새와, 걸어 닿는 곳을 응시하는 내 미련인가 봐. 참 살아갈만하다가도,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보이면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던 때로 말이야.
집에 틀어박혀서 가끔만 창 밖을 내다봤는데, 그때마다 아직 눈이더라. 아직 함박이더라. 나는 눈이 잠시 흘러서, 아주 지나가듯이 춥고, 지나가듯이 젖고, 지나가듯이 서럽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많이 내리더니 세상이 온통 하양이더라. 어느새 겨울 한가운데 꽉 끼어버린 거야. 어제도 춥고 오늘도 춥고, 분명히 내일도, 내일의 내일도 사무치게 추울, 겨울의 한가운데 말이야. 너에게 받은 시 몇 편이 있거나, 우리 같이 있는 사진 몇 장이 있는 겨울이면 딱 견딜 만큼일 텐데. 너의 목소리나 너의 온기가 있는 겨울이면 나는 그 계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남은 백 개의 겨울을 슬퍼하더라고. 눈이 오면 막 빨리 걷더라고. 내 발끝만 쳐다보면서 걷더라고. 그러니까, 딱 너 글자 몇 장만 있으면 살 수 있을 텐데.
아직도 조금 춥게 입고 다니니? 보는 사람이 더 춥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말이야. 그러면 지금도 추울 텐데. 안에서 밖을 보고 있기를.
2008년 1월 9일 마리가
편지에는 딱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는 냉담한 줄만 알았는데, 우리의 헤어짐을 털고 새것처럼 사는 줄 알았는데, 그도 애쓴 모양이었다. 십여 년이 지나기 전에 내가 그의 편지 발견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주 서서히 그를 잊었다. 내 주위 대부분의 이들이 그를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내가 그를 아주 사랑한다고 했다. 왜냐면 나는 그가 주는 상처들을 기꺼이 견뎠으니까. 그의 눈물을 차마 보지 못했으니까.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가 막 이별했을 적에는 나는 그 말들이 어느 정도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어떤 것은 또 틀린 말이었다. 나는 그를 더없이 사랑했으나, 또 충분히 그를 잊을 수 있었다. 마리가 하는 말들은 내가 써 내려간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내 슬픔과 닮아 있었다. 당시의 슬픔. 당시의 그리움. 나는 눈 내리는 겨울 사이에 왜 너의 한 겨울을 드디어 발견했는지 궁금했다. 내가 너를 아주 잊고 다시 살듯, 너도 꼭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나는 편지지를 뒤집고는 남은 말을 써 내려갔다.
이별은 뭔가 절단되는 것 같다던데, 아니던걸. 너 만나고 내게 자라난 것들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거든. 헤어지더라도 그 자리가 댕강 잘려나가는 게 아니더라. 다만 우리가 만든 감정이 너 이름을 하도 불러서 한동안 아팠어. 너를 부르고,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워서 아팠어. 이젠 완전히 가벼워졌어. 너도 그렇지? 날이 많이 추워. 안에서 밖을 보고 있기를.
2022년 1월 20일 마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