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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음 Oct 29. 2022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밤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치안 좋은 한국에 살고 있지만 밤에 혼자 이동하는 게 불안한 나는, 혼자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름의 하루 일과 시간과 규칙을 정했다. ‘몇 시에 출발하든 숙소에는 해지기 전에 들어오기’라는, 누가 들으면 깜짝 놀랄지 모를 규칙을. 렇게 잠들지 못하는 새벽의 두려움과, 해지기 전 귀소본능이 합쳐진 내 여행의 주된 활동 시간은 아침 11시(혹은 낮 12시)부터 저녁 6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낮 동안이라고 해서 혼자 다니는 게 무조건 마음 편하거나 만만한 건 아니었다. 대다수가 그렇지 않긴 하지만 여전히 혼자 다니는 여자가 좀 만만해 보이는지 시비 아닌 시비를 거는 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남자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 남자분들도 이런 경우가 많은지를 잘 모르겠다.)




 보통 3박 4일이나 2박 3일 정도의 일정으로 제주도를 오면, 바다나 경치가 좋은 곳과 휴양지를 끼고 있는 숙소 위주로 자동차 여행을 즐기겠지만 나는 시간적 여유도 있고 또 뚜벅이였기에 공항에서 가장 가깝고 심리적으로 만만한(? 제주도는 시내가 더 한적한 듯하다...) 시내를 먼저 여행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지 2~3일째. 조금은 설레고 두렵기도 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향한 시내의 한 카페. ‘순아커피’라는 오래된 일본 가옥 카페였는데, 친절한 사장님 덕에 기분 좋게 2층 방에 올라가 앉아서 조용히 커피도 한 잔 하고 그곳에 비치된 제주여행 안내서도 읽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리 오래지 않아 다른 손님이 와서 자리를 잡길래 그분에게 혼자만의 2층을 선물(?)하고자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다. 근처에 있던 제주목관아를 가서 햇살 좋은 날씨를 만끽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뚜벅이답게 열심히 걸어 동문시장 근처 산지천까지 구경하고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야!” 저 멀리 다리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아저씨 한 분이 소리를 질렀다. 나와는 꽤나 먼 거리에 있었고, 그분도 동행과 같이 앉아 있었기에 당연히 술김에 상대에게 소리치는 줄 알았다.


 “야!” 좀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다시 큰 소리가 들렸지만 혹시라도 괜히 봤다가 시비가 걸릴까 봐 쳐다보지 않았고, 빠른 걸음으로 최대한 멀찍이 그 옆을 지나치는데 다른 한 아저씨가 소리쳤다. “아가씨!”


 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아까부터 소리지르던 “야”가 나를 부르는 말인 걸. 잘못한 것도 없고(오히려 잘못은 그분들이 하신 거 같은데.), 대낮이었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나가고 있었음에도 너무 불안해진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딱히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도, 그렇게까지 내 마음대로 하는 일도 잘 없다 생각할 만큼 소심한 1인으로서, 왜 이토록 다른 이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조용히 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소심인(小心人)은, 단 세 마디로 소중한 여행시간을 침범당한 뒤부터 더는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햇빛과 예쁜 풍경들조차 위로가 되지 않을 만큼.


 아직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았기에 발걸음을 옮겼지만, 어딘가로 이동하면 할수록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많이 하면 할수록 마음속에 차오르는 슬픔과 무력감을 참아낼 수가 없어 까아맣게, 재가 되어버린 오후 반나절.




 그런 그날의 힘듦을 상쇄해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또 사람에게서 느낀 감정이었다. 장을 보러 다녀오는 길, 버스에서 내리는 학생들과 퇴근길 직장인들을 보면서 느낀 순간의 감정. '여행지에서 살아보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곳의 일상을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 준 감정들.


 내게는 늘, 여행지이자 관광지이기만 했던 이곳 또한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고, 그들의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곳이라는 점. 그렇게, 내가 여행 온 이곳이 그들의 일상이듯, 나의 일상 또한 누군가에게는 여행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러니 그들이 오늘을 살아낸 이 공간은, 낯설면서도 어쩌면 익숙하고 온기 어린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꾸만 주눅 드는 어느 '혼자'에게 왠지 모를 위로와 위안이 된다는 점.


 그렇게 나는 또, 사람이 뱉어내는 지독함을 사람이 내어놓는 온기로 한 번 더, 덮어 안아 보자며 잠을 청했다. 햇살 좋은 오후 내내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그런 밤, 그런 하루. 내일은 조금 더 숨 쉴 만한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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