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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plica Nov 01. 2020

함부로 위안을 건네는 시대

대책 없이 '괜찮다'고 말하지 말아요




나의 취미 중 하나는 서점에 들러 요즘 팔리는 책들의 타이틀이나 카피들을 읽어보는 거다. 가끔 심심하면 온라인 서점에 접속해 필터를 정렬해보기도 하고 끌리는 제목 몇 개는 직접 눌러 목차나 상세페이지 속 주요 문구들을 꼼꼼히 뜯어보기도 한다. 독서에 호감 있는 사림인 것도 맞지만 더 큰 의도는 그 조금의 브라우징을 통해 요즘 사람들의 마음 상태와 이를 자극하려는 마케팅의 방향성을 읽어볼 수 있어서다. 직업병 돋는 의식 같은 거긴 한데 요즘 흥하는 베스트셀러들의 초식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트렌드 저널이나 유익한 컨텐츠보다 훨씬 날카롭게 요즘 세태를 읽을 수 있다. 뭐든 ‘미쳐서‘ ‘알파’를 창조하고 스스로를 ‘브랜딩’하라는 과잉 생산의 고압적인 시대를 지나 너도 나도 ‘힐링’과 ‘욜로’를 미덕으로 찾아 떠나는 시대도 지나 보았다. 최근에 느낀 요즘의 마음 트렌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 나, 나’를 강조하며 ‘위안’과 ‘~해도 괜찮아’를 들숨날숨에 건네는 시대 같다. 언제는 달리고 미쳐서 쟁취하고 끝없이 변하라더니 이젠 밑도 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가 괜찮단다. 전자가 필요 이상의 셀프 착즙을 장려하며 전 국민을 안달복달 자기 계발에 목숨 걸게 만들었다면 후자는 나른한 삽화와 갖고 싶은 북디자인, 서걱서걱 예쁜 필기체를 동반,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이라면 응당 소장해야 마땅한 책 쇼핑으로 우릴 유혹한다. 나는 누구보다 에세이 장르를 사랑하고 잘 쓴 글에 대한 동경과 자극이 절실한 사람이라 아주 오랫동안 이런 류들의 책들을 탐닉해 온 열혈독자다만 최근의 이 거대한 흐름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심지어 방만하단 생각까지 들게 한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괜찮단 말인가. 이 책들을 채우는 활자들의 구조는 놀랍도록 유사한데 자존감, 나다움, 단단함, 회복, 위안 등 무슨 필수 포함 어휘를 끼고 쓴 논술 답안이 연상될 정도다. 비슷한 부류의 책들을 연달아 읽을 땐 이 책이 저 책인지 이 구절은 어제 본 그거 같은데 싶은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심하게는 책 표지와 글씨체, 종이 두께만 달라졌지 전작이랑 뭐가 다른지 헷갈리는 경우마저 있다. 모두가 비슷한 이야기를 큰 고민 없이 쏟아내고 있단 반증이다. 물론 단어나 구절은 죄가 없다. 내용 역시 맑고 투명하고 착한 이야기들 뿐이다. 나 역시 이 책들을 관통하는 나다움에 대한 기조나 안팎으로 나를 보살펴 자아를 단단히 하는 과정들이 인생에 매우 중요한 과업이란 생각에 동의한다. 핵심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론에 있는 것 같다. 어떤 책들은 적당히 말랑말랑한 일러스트와 감성적인 레이아웃을 방패 삼아 이런 허울 좋은 단어들을 영혼 없이 반복하기만 한다. 그래서 어떻게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지, 작가 고유의 관점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듣기 좋고 부드러운 구절들만 반복하며 일단 다 ‘괜찮다'며 독자들을 다독이고 본다. 대체 뭐가 그렇게 괜찮은 걸까. 누구보다 열심히 자기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젊음을 빼곡히 소비해 온 세대 앞에 이렇게 무책임하게 그냥 나를 믿어주고 그 결정이 옳다고만 하면 끝인가, 싶은 허탈감. 독서를 마치고 꼭 뚜렷한 목적을 떠올리며 엉덩이를 떼야하는 법은 없다만 이렇게 덮어놓고 낙천적인 말들만 도배를 해 놓은 책을 만났을 땐 잔잔한 배신감마저 느낀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 괜찮다는 말 한마디가 고픈 이 세대의 아픈 곳을 성의 없이 쿡- 찌르고만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책이나 문장이야 말로 각자의 소화법과 용처가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컨텐츠기에 누군가는 내가 일갈한 저 책을 해쉬태그 #인생독서라 포스팅할 수도, 힘들어하고 있는 절친에게 선물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 그럴 수도 있듯 나는 이런 성의 없고 기계적인 위안과 위로가 싫다. 글로, 문장으로 나를 어루만져주고 싶다면 적어도 작가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라도 고유의 관점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게 꼭 작가가 제시한 방향과 다르더라도 내 식대로 소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수학 문제집 정답지처럼 꼭 맞는 솔루션이 아니어도 좋다. 나의 정답을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이, 문장과 문장 사이 틈으로 허락되었으면 한다. 때론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이어도 좋다. 끄덕이기 어려운 상반된 생각을 읽을 때 나의 주관을 다시금 돌아보고 이를 더 단단하게 굳힐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으니까. 아주 생경한 경험도 좋다. 책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해볼 수 없는 타자의 이야기를 간접경험하면서 작금의 현실에 대한 자각을 더욱 직관적으로 하게 될 수도, 그 속에서 내가 원하는 방향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해볼 수도 있다. 어떤 글은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 안에 꼭 답이나 찌릿한 인사이트가 있어서가 아니다. 작가의 생각을 담백한 문체로 풀어냈을 뿐인데 그간의 깊이 어린 사색의 농담(濃淡)이 배어 나와 글 자체로 빛이 나는 경우다. 꼭 의도가 대단하지 않아도 문장 그대로 적확한 단어와 유려하게 흐르는 잘 쓴 글을 볼 때도 비슷한 마음이 든다. 문학이 주는 순수한 기쁨 같은 거랄까- 정성스레 빚어낸 예술품은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휴식을 준다. 현실에서 조금 빗겨 나의 삶을 관조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주고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짜 숨을 뱉고 나를 돌아볼 수 있다. 최소한 누군가에게 위안이란 걸 건네고 싶다면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거나 최소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라도 느껴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일상도 서점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좋지 못한 시국과 치열한 경쟁 사회에 지쳐있을 모두를 위해 너도 나도 위안을 이야기하고 괜찮다는 말을 건넨다. 물건을 팔고 싶은 기업도, 명망 높은 지식인도, 시청률을 원하는 티비 프로그램도 모두 그렇게 우릴 위로하려 한다. 선하다 볼 수 있는 그 의도는 충분히 알겠으나 대책 없이 괜찮다는 위로 속에, 더 큰 낙담을 경험하는 나 같은 뾰족이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음 좋겠다. 챙겨주고 위로를 해줘도 지읒리을이라면 글쎄 부덕함에 할 말은 좀 없긴 하다만 세상에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결국 둘로 수렴하지 않을까. 정공법으로 진짜 제대로 문제를 해결해 줄 솔루션을 주거나 조용히 그냥 자극하지 않는 것 말이다. 진짜 위안을 주고 싶다면 상대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에 빠져있는지 충분히 고민하고 성의 있게 손을 내밀어 주는 배려를, 아니라면 꼭 문제 해결을 나서 주지 않아도 좋으니 가만히 그냥 지켜봐 주는 거다. 껍데기만 크고 화려한 그런 ‘괜찮아'말고, 요청한 적 없는 함량 초과의 ‘위안'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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