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plica Nov 01. 2020

내 꿈은 둔감왕

두루뭉술하고 뭉뚝한 삶을 위하여

두루뭉술하고 뭉뚝한 삶을 꿈꾸며



장래희망이란 빈칸에 이미 당도해버린 삼십 대 직장인이지만 앞으로 꿈이 뭐냐는 질문엔 생각이 복잡해진다. 능동적으로 행복을 캐내고 그걸 쪼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낭만적인 꿈을 꾸기도 하고 회사원이 아닌 제2의 직업적 자아를 곧잘 상상하기도 한다. 취미는 엄마 돈으로 선택권 없이 배울 때가 아닌,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내돈내산 할 때 열 배는 더 즐겁고 소중하단 깨달음을 발판으로 세상 여러 가지 잡기에 도전하며 후천적 취미왕을 꿈꾸기도 한다. 자가를 마련해 여기저기 취향대로 질펀 꾸며놓고 집순이 라이프의 퀄리티를 높이고 싶은 즉물적인 바람도, 쿵짝 잘 맞는 짝꿍이랑 재밌고 따뜻한 가정을 꾸려보고 싶기도 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꿈을 꾸는 주체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나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어릴 땐 빈칸에 적어낼 수 있는 명사형의 꿈, 이를테면 직업이나 어떤 롤로 나의 꿈을 규정했다면 그걸 이뤄도 보고 실패도 하는 과정들을 거쳐 내가 진짜 무얼 꿈꿨을 때 가슴이 뛰는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할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저런 버전 업데이트를 거듭해간다. 그 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여러 번 고민할수록 행동력이 더해지고 방향성이 명확해진다.



더 나은 밥벌이도, 부자나 후천적 미인도 아닌 간절한 꿈이 내겐 하나 있다. 바로 둔감왕이 되는 것이다. 특히나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는 이전의 것보다 반경이 훨씬 넓어진다. 세상에 별별 사람 있구나를 깨닫기도 하고 같은 학교를 다니며 비슷한 동네에 산다는 것이 그 자체로 얼마나 큰 공통점을 시사하는 것이었는지도 깨닫게 된다. 그 과정 과정 중 가장 날카로운 경험은 세상 사람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굳이 불편한 상황과 좋지 못한 관계를 통해 확인할 때다. 우린 가끔 서로를 오해하기도, 나의 진심이 제멋대로 왜곡되어 상대를 할퀴기도, 그 누구도 의도한 적 없지만 여기저기 나버린 생채기로 가까웠던 관계가 급랭해버리는 결과를 맞기도 한다. 굴곡을 딛고 더 단단히 굳어지는 관계도 있지만 실없는 이유로 긴 인연이 뚝 끊어져버리기도 한다. 비단 인성이 부족하고 마냥 나쁜 사람을 만나서였을까? 세상 모든 관계는 상대성에 기반한다고 난 믿는다. 내게 한없이 따스하고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겐 까탈 쟁이 외골수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멀리하고 싶은 이가 누군가에겐 인생 멘토로, 인생에 가장 큰 스크래치를 남긴 천하의 막장 배신 스토리가 상대방에겐 대수롭지 않은 해프닝이기도 하다. 모든 건 결국 같은 사건과 같은 대사, 같은 행동과 같은 대처를 두고 어떤 기준으로 이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의 문제로 떨어진다. 고유의 기질처럼 예민함의 폴더 위치는 모두 다르고 그에 따라 결론도 달라진다. 때아닌 절친 모드가 켜질 수도, 뜻밖의 손절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다. 예민한 사람은 그 모든 순간들의 온도와 날카로움, 기저에 깔린 뾰족한 의도와 인간 여럿이 모였을 때의 야만성 같은 것들을 부스러기 하나 놓치지 않고 알아챈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무시하고 못 본 척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그런 거다. 적당히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고 싶지만 말 한마디의 어조나 미묘한 말투, 끝을 흐리는 그 디테일 하나하나가 오감에 바로 꽂혀버린다. 그 모든 요소들이 뒤엉켜 오늘 다른 이들과 나눈 모든 관계들의 그림자를 만든다. 인생의 목표를 조심조심 갈등을 최대한 피하며 살아내자로 잡았다면 이런 친절하다 못해 숨 막히는 시그널들이 고마울 수도 있으려나. 예민한 하루하루가 쌓여 피곤한 과정들이 반복될수록 삶은 어딘가 좀 서글퍼진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옛말에 자꾸 고개가 끄덕여진다. 모르고 싶다. 눈치는 강아지나 주고 싶고 남들 다 알아채고 차라리 맨 나중에나 어머 그랬구나 하고 뒷북이나 치고 싶다. 아예 모르고 그냥 넘어가면 베스트다. 굳이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관계의 생리를 나의 날 선 오감으로 다 캐치하고 해석해서 속에 새기고 싶지 않다. 일대일의 상황도 피곤하지만 멤버가 늘어나고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예민한 이런 성격들로 모임 자체가 피곤해진다. 아주 선하고 바른 성인군자들을 다 모아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한 개인의 도덕성이나 좋고 나쁨의 기준이 아닌, 인간이 둘 이상 모였을 때 무조건 생겨나는 지독한 숙명이다. 선함과 선함이 모여 결렬이 될 수도, 좋음과 좋음이 만나 파국을 그릴 수도 있는 것이다. 



바닷가 조약돌처럼, 모난 곳 하나 없이 뭉뚝하고 둥글 지게 살고 싶다. 치밀한 기싸움과 해수면 아래 치열하게 벌어지는 암투의 중심 말고 그런 것일랑 눈치챌 수도, 판에 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둔감하고 느린 사람이고 싶다. 살을 빼고 싶으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시험에 붙고 싶으면 기초 먼저 다진 뒤 응용문제를 반복하면 되는데 예민해 죽겠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둔감왕이 되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알려주는 곳이 없다. 내가 나를 생각하며 이해가 안 되거나 문제라고 여긴 부분들이 많았기에 관련된 책도 많이 읽고 유튜브나 전문가의 견해도 찾아보며 여즉 학습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꼭 어두운 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의 예민함은 절대적 단점도 세상에 꼭 불리하기만 한 핸디캡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요즘 같은 세상에 뾰족한 전문성을 키우고 독창적인 세계를 그려나가기에 유리한 성향일 수 있다. 이런 기능적 장점이 아니더라도 내가 나를 잘 이해하고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려면 내 성격이 가진 특질과 생각의 방향을 잘 알아야 한다. 예민함을 손금이나 혈액형처럼 박아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테스트하며 끝없이 이를 다듬어 나가야 한다. 뒤에 이어질 내용은 내가 나로 실험했던 결과값들이자 한 번 시도를 권해보고 싶은 작은 처방들이다. 






이전 05화 운을 믿지 않는 기획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