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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니처 목소리

by 이혜연


봄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꽃이 피기도 전에 코에 들이치는 바람 중 한줄기 따스한 빛만 느껴져도 귓속을 맴도는 음률이 흥얼흥얼 콧소리를 내며 계절을 열고, 시간을 들이쳐 세상 속에 펼쳐질 수 있게 하는 시그니처 노래들이 있습니다. 항상 노래가 꽃보다 빨갛고 하얀 눈보다 앞섰던 것 같습니다.


김동률의 노래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한 잎을 간신히 붙들고 차갑게 들이치는 북풍에 안간힘을 쏟으며 버티고 서있는 저녁나절에 마음속에서부터 울리는 노래입니다. 지난 주말 친구네 식구들과 김장을 해서 냉장고 가득 신줏단지보다 귀하게 김치통을 모셔둔 후 부쩍 다가온 겨울 앞에서 하루 종일 김동률의 노래를 읊조려봅니다. 겨울나기 음식이 쌓이니 여유로운 몸짓으로 허밍으로 부르던 노래가 나중엔 절규가 되어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고 갑니다.


'이방인의 졸업',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목놓아 부르며 잊혀버린 연애세포를 깨우고 착해지고 싶었던 그날들을 떠올려보며 꺼져가는 마음의 불씨를 감싸봅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날짜들도 얇아지고, 다시 꿈꿔야 하는 시간들이 버거움으로 다가오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노래가 여는 비밀의 방을 열고 나만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스무 살 힘겹게 헤매면서도 사랑을 꿈꿨던, 좋은 사람이길 바랐던 어린 날의 저와 조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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