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 노인 모두가 싫어한다는 백작의 노인 이야기 12
나이가 들면 노인이 되거나 어른이 된다고 한다. 난 성숙한 어른이 되길 꿈꾸고 있다.
더해서 평생을 소비 또는 소모하며 살아왔기에 이젠 성숙한 ‘생산자’가 되고 싶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젊음, 건강, 재능, 시간을 더해서 돈을 소비하고 또 낭비하며 산다. 소비는 자본주의 국가 특히 도시 생활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미덕이요 필수라 하겠지만 인간은 끝도 없이 소비의 욕구를 채우며 또한 그 잔재를 낭비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러한 기준의 삶에서는 당연히,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는 가’와 여생을 더 편안하고 풍요롭게 지키기 위한 경제력, ‘즉 돈을 더 버는 일’ 이 가장 우선하고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더 하여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은 필사적이기까지 한다. 그 모든 것들의 유기적이고 체계적인 조화를 위한 정신적 기저로서의
‘성숙한 사고’와 유연하고 ‘생산적인 행동방식’을 수립하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숙한 어른’ 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과 지식과 지혜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생각과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도전’이다. 경험은 실패를 줄여주지만 고정관념을 만들어 자신과 타인을 틀에 가두는 부작용이 있다. 그리고 경험과 지식이 합쳐져도 생각은 생각일 뿐, 실제와는 차이가 많아 이상과 몽상의 경계에서 자칫 길을 잃기 쉽다. 물론 무식한 사람이 용기 있으면 ‘망하는 지름길’ 이란 말처럼 무조건 실행, 스타트 업 해버리는 실천은 더 위험한 길이 되기 십상이겠다.
성숙한 이생, 어른으로의 삼생까지 성공적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산적 이어야 하겠다.
나도 나이가 들어 정신과 육체 그리고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성을 알아가는 중이라 꿈이나 목표에도
무엇보다 구체성을 대입하려고 한다. 인간의 삶에서 주요하다 인식되어 온 몇 가지 핵심 단어를 통해 앞으로 ‘어른’ 이란, ‘성숙한 어른’이란 즉 노인 아닌 ‘성숙한 생산자’가 되려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 표현해 보려 한다.
첫 번째 핵심은 ‘친구’ 다
우선 ‘오랜 친구’와 또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 모두 다 중요하다. 만일 그 차이를 따지면 혈연,
학연, 지연의 모순에 빠진다. 함께 일생동안 인생의 대소사를 같이 했던 친구든, 일로 알게 되어 또는 취미,
동호인으로 만나서 우정을 키워온 친구이던 인생의 긴 여정에서 친구는 제일 중요하다고 나이 들수록 느낀다.
물론 자신을 중심으로 주장하는 말이다. 왜 가족이 아니냐고? 부모님 보다, 자식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냐고?
이런 분은 어른이, 성숙한 어른이 되기 힘들다.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니 여기까지만 까겠다.
“우정은 무엇보다 생산적 이어야 한다”
가장 행복하고, 걱정 없이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인연으로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청춘을 함께 소비하던 우정은 20대를 지나면서 최측근에서 벗어나 취업, 결혼에 이어 자식들 키우고, 가족을 지키느라 오랫동안 주변에서 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사랑과 달리 30년 만에 만나도 친구끼리는
10분 내로 출발선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만다.
우리들 인생 전반 고생하고 늙어 다시 만나고 모였으니 제대로 한번 놀다 가자~
먼저 건강을 위해 산에 가자, 자락 길 좋다, 꽃구경 가자, 여행 가자, 회비 모아 유럽 가자~
비 오는 날 광장시장 순희네 빈대떡에서 막걸리 한 잔 어때? 최고지?
손주와 자식들과 보내는 시간보다 더 즐겁다. 재미있다. 만일 우리들 여생이 십 년 여만 남았다면
힘닿는 한 제대로 즐기며 볼 거 다 보고 먹을 거 다 먹으며 진으로 놀 다 가야지.
하나 내가 알기론 올해 100세를 넘기신 김형석 교수님이
“내가 60대에 90을 넘어 30년 이상 더 살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야”라고 말하셨단다.
한참 후배들인 우리들은 큰 탈 없으면 30여 년 어렵지 않게 더 살 것, 이미 잘 알고 있겠다.
친구는 정말 중요하다, 가족, 가정, 사랑, 일 보다 어쩌면 제일 중요하다. 한 번 더 강조한다.
우정은 무엇보다 생산적이어야 한다. 놀기만 하며 살기엔 시간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 이제부터 생산적으로 살아 보자. 같이 농사를 짓자는 것도 사업을 하자는 것 또한 아니다. 사람마다
개성과 가치와 생각이 다르니 소비만 아닌 생산적인 삶의 형태 또한 다를 것이나
기본적인 주장에 동의한다면 ‘우문현답’ 해 주시게나.
예상한 대로 두 번째 핵심은 ‘가족’이다
가족은 무엇보다 더 중요 한지를 따질 수 없는 관계이다. 500년 유교사상과 동양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
혈연은 이미 우리의 DNA에 박혀 유전처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까지 지배해왔다. 그러므로 어떻게 감히 위대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의 전통과 정통의 고결함에 오염 또는 상처 낼지도 모를, 생각이나 시각 따윈
그 어떠한 거론조차 금기시해온 지 이미 평생이니, 자칫 거론하기 불편한 부분이며 그 속에 가족, 가족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간을 이루는 생각이라고 해도 무방할 유교의 이중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법의 명시를 넘어 존재한다. 또한 가족 안에서 부모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라서 거론조차 못하며 갈등을 오랫동안 방치하였다.
역시 서론이 긴 것은 민감한 이견이 많은 부분이라 그렇다.
“가족, 가족관계도 무엇보다 더 생산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무조건이다. 형제자매도 그러하다. 그래서 어머니, 엄마는 늘 옳다.
이상하게 비껴가는 아버지 부분은 따로 다뤄야 할 듯하다. 자식이 부모를, 특히 어머니의 삶에 대해 지식을
쌓아가고, 성인이 되어가며 이해하려다 보면 그분의 삶에 모순 덩어리의 희생과 포장이 난무하더라.
뭘 어떻게 도움을 드리고 감히 바로 잡을 수도 없겠지만 이제라도 바른 방향, 객관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단지 말 뿐이라도 올바르게 해 드리려면 상황에 따라서는 극단으로 몰려 후래 자식, 패륜아 되는 것,
순식간이다. 흥분해서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나를 생산하고 먹이고 키우며 공부시키며 당신을 소비시킨 부모에게 성장한 자식들이 간병인, 도우미, 돌봄이. 까까 사드리는 것이 다 인가. 소비를 소비로 돌려드리는 것 성숙한 어른으로 할 수 있는 최선 인가.
잔가지를 쳐내고 기둥으로 돌아와서 부모와 자식은 사랑하는 관계이다.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서로를 위해
불속으로, 물속으로, 자동차에 뛰어든다. 그렇다고 부모님은 오로지 진실로 자식 만을 위해서 공부를 강조하고, 안정되고 힘이 되는 진학을, 직업을 시키려고 했을까. 우리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 때 에는 남자아이는 판검사, 의사 90% 외에는 학교도 아니었다. 예체능은 집안 망조. 지금은 아닌가. 지금은 나아졌네. 많이 버니까. ㅎ
이 시대는 딴따라? 들이 노래 하나로 전 세계로 진출하고 한 번에 수십억을 벌기도 하고, 국회의원도 한다.
그럼 과거의 부모님은 무식했었나. 아니다. 소비의 삶을 기준으로 형성된 시절의 통념을 따른 것일 뿐.
그러하니 언제나 부모님을 어른으로 대하고 존경하되 정확한 말을 할 수 있어야 바로 생산적인 가족관계가
시작되는 것으로 가족 간의 대화를 더더욱 성숙하게, 생산적으로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궤변은 가족의 사랑이 효의 문제를 넘어, 세상을 보며 인간을 대하는, 삶에 대한 성숙함과 생산적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며 이 기회에 말해 보려는 것이다. 현시대 우리가 자주 흥분하는 이슈, 내로남불의 근원이 가족에서 출발했다면 과할까? 우리는 과도기에 평생을 ‘낀 세대’로 살았고, 그래서 우리 세대가 풀고 가야 할 숙제 같아 살짝 흥분해 본다. 친구들과 노년 황금기 30여 년을 재밌게 놀다가, 가족들과 잔치하고 겉으로 화목하게 지내다 그대로 떠나 버리고 나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전 세대와 그저 신구의 단절로 끝날 것 같아 이 참에 욕먹을 각오로 판도라를 열었다. 쪼금 만.
세 번째는 역시 ‘일=Work’이다
노인에게 '일=돈' 은 아니지만, 또한 맞다. 100세 시대가 더 이상 목표가 아니고 이미 도래한 시대라 1~30대, 30~60대, 60~90대로 전반, 중반, 후반으로 나눠서 구분하면 중반기였던 30~60대의 ‘일’은 이름이 많다.
'일'은 성취=희망=자존=자부=긍정 등이고 현실적 단어로 '일'은 저축=소비=투자=주택=차=골프채 등과 같은 의미로 존재해 왔다. 즉 많은 희망과 여유와 편함과 자부심을 주었지만 과한 소비와 허세와 불평등, 권력의 남용, 신체의 파괴 등 긍정적으로 만 존재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일도 아니 ‘일’ 이야말로 생산적 이어야 한다”
친구와 가족에 이은 핵심어 ‘일’에 대해선 우리 동년배 세대인 베이비부머께 귀한_요새 표현으로_꿀 팁 하나 드린다. 우리 세대가 한 창이던 70년~2000년대까지 교육, 진학, 취업, 은퇴까지 전 생애에 걸쳐 쏠림현상으로 여러모로 불리했던 시대의 단점을 오히려 역 활용하라고 말씀드린다.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온 문화, 경제, 정치와 기술의 변혁의 시대로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거쳐 밀레니엄을 넘어 스마트 시대를 경험하며 이제 손바닥에서 세상을 보는 복합적 시대를 사는 ‘유일한 세대’이다. 짧게는 30여 년 길게는 50여 년을 살아오며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뛰던 시절 해 왔던 ‘일’을 통해 깊이 각인된 우리들의 유전자는 앞으로 귀하게 쓰일 것이며, 이미 활용되고 있다. 그러니 뒷방에 앉아 피하지 말고, 스마트폰으로 수다나 떨지 말고 '일'과 '일선'에 앞장서 나서자.
노화로 불편해져 가는 몸은 절대시 하지 않으며, 경험과 노하우와 지혜는 앞으로도 우리의 삶의 가치를 더 높고 성숙하게 또한 생산적으로 만들어 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살아온 기간이 있어할 이야기도 끝도 없지만 제한이 있는 글을 쓰다 보니 세 가지 정도의 키워드로 나의 주장을 펼쳐 보았다. 앞으로도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닌 ‘예술’. 더 이상 불평등과 부조리를 맡길 수 없는 ‘정치’.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만 아닌 ‘봉사’.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로 오염되어가는 ‘종교’와 무너지는 ‘환경’에 대한 성숙한 시각과 생각을 기꺼이 주장하며,
우리들의 ‘생, 로, 병⦁병⦁병, 사’ 이야기를 나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