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스치는 사람들
성근이와 아영은 각각 맥주 500ml와 소주 한 병을 나눠마셨다. 조용한 정적 속에서 각자의 말을 마음에 품고, 천천히 마신 술이었다.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나, 생각해 보면 입으로 뱉은 말보다 마음으로 한 말이 더 많았을 것이다. 서로의 대한 예의라기보다, 각자의 이야기를 다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말을 아꼈던 것이다. 그렇게 성근과 아영은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서로를 위해 발걸음을 맞춘 듯하였지만, 여전히 성근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랐고, 아영은 총총거리면서 그 뒤를 따랐다. 아영은 성근의 발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나 여기서 버스 타면 돼. “
”아, 그래? “
성근의 뒤에서 아영은 성근에게 말을 건네었다. 빠른 걸음의 성근은 아영이 멈춰 선지도 몰랐다. 아영은 성근을 뒤따르며 힘들었던지, 색색거리고 있었다. 아영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정류소에 도착해서 기뻤다. 자신이 돌아가야 할 길은 생각보다 빠른 곳에 있었다.
”버스 타는 거 보고 갈게. “
”그냥 가도 돼. 시간 늦었어. “
아영은 성근에게 손사래를 치며, 얼른 들어가라고 했다. 성근은 멋쩍어하며 자신의 길을 걸었지만, 아영에게 미안하다거나 아쉽다는 마음은 없었다. 성근은 아영에게 다음에 보자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갔다.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소는 다소 멀다고 생각이 들었다. 언제쯤 도착하려나, 하며 휴대폰을 쥐고 걷던 중, 자신도 모르게 도착한 정류소에서 운 좋게, 바로 도착한 버스를 타고 성근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 성근이는 아영이 행사하는 품목을 사갔었다. 그리고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이렇다 저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일상에 충실하게 지냈을 뿐이었다.
”그 남자애 이제 안 보이네? “
”그러네요. “
”너 좋아해서 왔던 거 아냐? “
”아닐껄요?“
”그럼? “
”신기해서? “
”신기해서? “
”마트에서 일하는 걸 신기해했어요. “
성근과의 몇 번의 짧은 대화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성근은 아영을 좋아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트에서 일을 하는 또래에 대한 신기함. 시급제가 아닌 월급제로 일하는 또래. 등록금을 벌면서 공부하는 아영이 남달랐고 신기했던 것이다. 성근은 ‘본받고 싶다. 나도 해보고 싶다’가 아닌, 이렇게 살아가는 친구에 대한 신기함. 다행히 공부를 못하지도 않으니, 언제든 연락해도 모지람이 없는 친구. 신기하고 대견하다고 생각하지만, 마트일은 좀 부끄럽지 않냐는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던 성근.
부끄럽다는 사람들 앞에서 서서 말을 건다는 걸까,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듯한 직업이라 부끄럽다고 하는 걸까? 분명 아영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되물어보던 성근의 얼굴이 선명했다.
아영은 성근의 반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 사회에서 번듯하고 멋진 직업만을 생각하며 공부를 하고, 대학에 진학하여 이제 막 꿈에 다가서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직업군에 접한 또래가 신기했을 것이고, 자신의 미래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 하며 지켜봤을 것이다. 일을 하고 있는 아영조차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신기할 문제인가? 아영은 조그마한 반발심도 가지고 있었다.
”나 초등학교 동창을 마트에서 만났거든 “
”응, 그런데. “
”근데, 나를 되게 부끄러워하는 거 같었어. “
”왜? “
”걔가, 엄마랑 한번 마트를 왔다? “
”응. “
”나를 못 본척하다가, 내가 빤히 쳐다보니까, 엄마 데리고 와서는, ‘이아영이에요. 초등학교 동창. 알바 중이래요.’ 이러더라,“
”응 “
”그래서 걔 엄마가, ‘대견하네. 등록금 버는 거니? 그럼 이 아줌마가 팔아줘야지. 하고 내가 행사하는 물건을 사갔어.‘ 그게 왜? “
”물건 담아서, 카트 돌려서 가는데, 걔가 그러더라. ’ 아영이, 이번에 지방에 있는 법대 들어갔대요.‘라고. “
”그게 어때서? “
”아니, 너무 뜬금없잖아. 카트 돌려서 가는데, 내가 법대 간 거랑 뭐. 마트에서 알바한다고 굳이 말하고. “
”다 사실이잖아. “
”상황이 다 좀 묘하잖아. “
”뭐,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 있는 건데,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여? “
”어. “
”꼬였다. 꼬였네. 뭐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니. 네가 법대생이라는 사실이. “
”무슨 소리야? “
”넌 방금 내 말을 이해잖아? “
아영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인정해 버리면 속물 같았다. 함께하는 동료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존중을 하면서, 스스로는 이들과 다르다고 선을 긋고, 그들과는 다른 보다 다른 사정이니까-라며 가볍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점점 마트일을 할수록, 이런 일들이 일어날수록 아영은 더욱더 강하게 부정했지만, 알고 있었다. 마트에서 일할수록 곱지 않은 시선을 모르는 이로부터 받는 거에 대해서,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 공부를 하지 않아서.‘ ’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일이라고 하고 있어서.‘등. 곱지 않은 시선과 더불어,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았다. 아영 아는 동창이며, 친구며, 선배들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이다. 공부와 함께 마트일을 하는 것은 대단하지만, 왜 굳이 마트일을 하냐는 선배. 잠깐 스쳐갈 아르바이트일 뿐이라는 친구. 다들 내가 마트를 아르바이트를 일로 하기에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마트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아영의 모습을 말리고 있었다. 그렇게 직업에 대한 편견과 생각들이 여실히 드러내던 시절. 아영은 주변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나날히 줄어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잘했다- 못했다의 이야기를 꼬아듣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스로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던 찰나, 잠깐 스쳐갈 아르바이트가 아영의 인생을 흔들고 있었다. 아영의 모습도 흔들고 있었다. 아영은 그 복잡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성근은 아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복잡한 생각이 달라졌다. 아영이 부끄러웠던 건 아니었다. 스스로 일궈나가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마트일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은 점점 크게 자리 잡았다. 아영이 밝게 웃으면서 손님을 맞이할 때도 있었지만, 간혹 난처해하고,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영의 위치였다. 뜨거운 불판 앞에서, 또는 추운 곳 한가운데에 서서, 손님들이 먹을 음식을 조리하고 권하는 모습. 먹어달라고 한번 봐달라며 서있는 위치에 성근은 아영이 멀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성근의 고민거리는 말끔하게 사라지고 난 뒤였다. 자신의 환경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확신이 없어도, 확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성근과 아영은 각자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